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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큰돈이 걸린 일이야. 자네 눈빛도 동하는군. 젊음은 돈을 필요로 하니까. 게다가… 여자에게 돈을 쓰면 늙는 것도 덜 느끼는 법이지.

ㅡ 리즈, 내 귀여운 리즈, 난 떠나! 먼저 바다로 갈 거야. 그럼 우린 알게 되겠지. 하나의 변화가 전부를 바꾼다는 걸. 끊어진 하나의 관계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다는 걸. 살인과 비슷해. 그리고 난 살인자야. 난 범죄현장에 총을 떨구고 온 거야. 하지만 넌 그 총에서 내 지문을 지워야만 해. 네 젊음은 이 혼란스런 불가사의함을 떠안고 가겠지. 그건 괜찮아. 난 떠나. 리즈,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지 마.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나를 잊어. 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해. 네 첫 그림이 기억나. 네가 그린 최고의 그림 중에 하나였어. “소녀가 다리를 벌리면 그녀의 비밀은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다”는 제목이었지. 하지만 피임없는 섹스는 하지마. 리즈, 다신 널 보거나 만질 수 없겠지. 인생이 내 지문을 너에게서 씻어내지 않는 한…. 날 잊어. 멋지게 살아. 사랑해, 리즈, 정말 사랑해. 영원히 그리고 결코, 안녕.

ㅡ 일은 꼭 성공해야 돼. 마크가 빚을 갚아서, 그의 두려움이 사라지도록. 그러면 그의 사랑이 다시 살아날 거야. 그 후에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갈 수 있겠지. 그는 날 정말 사랑해. 너는 몰라. ㅡ 아뇨, 알아요. ㅡ 그가 내 어떤 점을 사랑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인생이 무척 쉬울텐데.

ㅡ 안나. ㅡ 응. ㅡ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사랑을 믿나요. 순간적으로 엄습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ㅡ ….

ㅡ 우린 끔찍했어. ㅡ 얘기해 봐요. ㅡ 그는 의대생이었어. 그가 연구실에서 주사기를 가져왔지. 한번은 서로의 피를 뽑아서 마셨어. ㅡ 그만요! ㅡ 어느 여름,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어. 그가 처음으로 포기했고, 그에게 화가 났었지. 우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같이 죽기로 했는데… 그 전에 깨져버렸어. ㅡ 리즈도 비슷했어요. 날 놀래켰죠. 어느날 밤… 오토바이를 타고 볼로뉴 숲을 최고 속도로 달리는데… 그녀 혼자 뛰어내렸어요. 다치진 않았지만, 죽을 수도 있었죠… 나중에 그녀가 얘기하길, 문득 내 사랑이 의심스러워져서 “만약 그가 다음 신호등에서 날 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난 뛰어내릴거야”라고 생각했데요.

ㅡ 잠깐! 끊지마요. 그래, 이제 당신을 볼 수 있어요.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당신 곁을 지나간다면 난 오랫동안 세상 모든 것의 곁을 지나가게 될 거란 것. 아니, 인생을 말하는 게 아니예요. 만약 그렇다해도 난 상관치 않아. 하지만 그건 인생이 아니야, 안나. 사랑해요. 알게 될 거예요.

ㅡ 아니, 당신은 이해 못해. 그가 얼마나 다정한지. 그가 저런 건 두려움 때문이야. 그가 이성을 잃는 걸 단 한 번 본적이 있어. 서랍에서 우연찮게 연애편지를 찾아냈을 때, 3년전 편지였는데, “안나, 나의 천사”로 시작하는 편지였어. 그는 내 머리채를 잡아 끌고 계속 소리를 질렀지. “말해!, 말해!” 나는 계속 울었고. “그 편지를 줘봐요!” 결국 그는 날 놔줬고 난 편지를 읽었어. 그 편지는 스위스의 샤토데에서 그 자신이 내게 쓴 거였어.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 왼손으로 썼던 거야. 자기 필체도 못 알아본 거지. ㅡ 잘 들어요 안나, 난 그 일을 할 거예요. 그가 나에게 돈을 주겠죠. 그리고 당신은 나와 함께 떠나요. ㅡ 싫어. 마크는 내 인생의 전부야. ㅡ “내 인생의 전부”라니, 역겹네요. 서른 살이고, 광장공포증인… 당신은 “당신 인생의 전부”가 내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내 돈 일부를 주고 안나를 떠날거야” ㅡ 지어내지 말아. ㅡ 아뇨. 들어봐요. 그가 말했어요. “안나는 날 우울하게 만들어, 그녀의 젊음은 너무 빨리 시들어가. 그녀를 볼 때면, 그녀가 이상해보여. 쓸모없어. 마치 차가운 보온병처럼 말이야.” 그가 했던 말이예요. 그가 말하길, “나는 살인자고. 그녀는 내가 범죄현장에 떨구고 온 권총이야. 내 유일한 희망은 내 지문이 씻겨나가는 것 뿐이지.” ㅡ 그만해. ㅡ 당신은 이별할 때를 알아야 해요. ㅡ 우린 항상 서로를 사랑했어. ㅡ 합선되버린 사랑이지요. ㅡ 그래, 그건 더 굳게되지. ㅡ 그건 암울한 거예요. 금고처럼 봉인되죠. 너무 늦었어요. 열쇠가 금고 안에 있을 땐 문을 열 수 없죠.

ㅡ 바다로 간 줄 알았는데. ㅡ 눈은 왜 그래? ㅡ 눈병이야. 널 믿어선 안 됐어. 넌 늘 말하곤 했지, 단 하나의 문장이 인생을 바꿔버릴 수 있는, 그런 소설들을 더 좋아한다고. 하지만 모든 일엔 댓가가 따르는 법이야. 넌 문장들을 칼처럼 던져댔어. 이젠 댓가를 치러야 해. 넌 자신의 인생을 또 다시 농락했어. 니가 읽고 또 읽은 수많은 책들이 널 끔찍할 정도로 일찍 어른으로 만들어 버렸어. 넌 정말 빨리 늙어버릴거야. 알렉스, 어느날 TV가 터지듯 너도 안쪽에서 터져버릴 거야. 리즈는 널 사랑해. 난 리즈를 사랑하고. 널 사랑했지. 하지만 오늘, 너를 보고 나 자신에게 물을 수 있는 단 한가지는, 혹시 네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혐오스런 시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거야.

ㅡ 스위스에 가면 뭐 할 거야? ㅡ 숲속을 거닐 거예요… 도로에 키스하고… 계단 하나하나에 고마워 해야지… 만약 살아 남는다면요… 그러지 못한다면 몹시 화가 날 거예요. 전 제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왔어요. 대충한 스케치처럼… 엉망으로… 바다 한가운데서 계속 부서지는 파도처럼 해안이나 암초에도 닿지 못하는… 사는 법을 배우기엔 너무 늦었어요… 아직 내 앞에 가야할 많은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을 되돌려 놓을…. 여자들은 항상 내게 말했죠. 복잡하게 살지 말라고… 최선을 다했지만… 단순하게 사는 건 어려웠어요…

ㅡ 리즈, 내 귀여운 리즈, 눈물을 삼켜. 다시 우는 널 보고 싶지 않아. 그게 이유지. 다 끝났어.

2011/01/01 19:44 2011/01/0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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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1

2011/01/01 00:44 / My Life/Diary
누군가 먹다 남긴 도가니탕. 켜놓고 잊어버린 가스불. 까맣게 타버린 탕그릇. 엄마가 나를 깨웠고, 불은 아빠가 껐다. “생각만 하느라 움직이는 법을 잊었어요.”  한밤중.
2011/01/01 00:44 2011/01/0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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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1 (2)

2010/12/31 19:09 / My Life/Diary

쫓기는 기분. 급하다. 붕 떠 있다. 뱃살이 늘었다. 말이 많아졌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쳐온 거다. 생각없이 말을 시작하고, 돌아서서 후회한다. 최악의 단어만 내뱉는다. 살아갈수록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 되고 있다. 말을 줄여야 돼. 좀 더 천천히 말해야 돼... 문장을 완성하고... 규칙을 따르고... 되도록 말은 말고... 웃기만 하자... 내 속을 그대로 내보이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어떤 상처도 주기 싫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싫다. 이미 너무 많아...

말과 글을 통해야만 소통할 수 있는 관계는 위험해. 그저 눈으로, 표정으로, 서로의 감촉으로 완전할 수 있다면.

입을 다물자. 글도 줄이자.

2010/12/31 19:09 2010/12/3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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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1

2010/12/31 01:06 / My Life/Diary
욕하고 싶다. 이제 욕도 못하는 바보가 되버렸어. 머릿속에서 생각이 너무 순식간에 교차된다. 생각하려하지 않아도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생각들이 생각을 좀 해달라고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자야 돼. 그럼 꿈이 되는 걸까.
2010/12/31 01:06 2010/12/31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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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0 (2)

2010/12/30 19:33 / My Life/Diary
절망이란, 떨어져도 바닥이 있어 제 몸을 뉘일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니? 좌절하기 전에 바닥을 흘끗 확인하고 제 몸을 떨구는 짓, 절망. 외려 완전한 나락을 눈앞에 둔 사람은, 바닥 없이 끝없는 추락의 공간을 마주한 사람은, 필사적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지.

절망이라고 말하며, 편히 누워 잔다. 징징대면서 끝까지 숨을 붙들고, 징징대면서 한 살을 더 먹고, 징징대면서 사랑을 곁눈질하고… 징징대면서… 징징대면서…

그래도 괜찮아.
2010/12/30 19:33 2010/12/3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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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0

2010/12/30 10:21 / My Life/Diary

눈이, 쌓였다 녹아. 내 속을 채우던 감정들도. 쌓였다 녹고, 다시 새로운 눈이 내리고, 나는 그걸 보고만 있어. 손 내밀어 건드리면 더 빨리 녹아버릴까, 가만히. 가만히. 어제 길바닥에서 한 시간 동안 택시를 잡으려고. 눈이 펑펑 쏟아져, 그저 순백의 마음에, “딱. 죽고 싶다. 이렇게 눈 오는 날.” 그냥 입 밖으로 소리 한 번 내보고 싶었는데. 옆에 동행이 있어서. 꾹 삼켰다. 그냥 입 밖으로 소리 한 번 내보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 눈도 소리 없이. 멍청하게 도로 위에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2010/12/30 10:21 2010/12/3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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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7

2010/12/27 03:22 / My Life/Diary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너는 죽지 않을 거야.’ 하고 말하는 것이다.”
ㅡ 가브리엘 마르셀 (피터 제발트,『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中)
2010/12/27 03:22 2010/12/27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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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4

2010/12/24 00:00 / My Life/Diary
직원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음~ 어떤 노래가 좋을까. 그래 “할렐루야”가 좋겠어. 레너드 코헨보다는 케이트 보겔이 부른 곡으로. 볼륨을 최대로 올리고. 이어폰을 두 귀에 꼽은 채 모니터를 집중하는 사내. 할 일은 언제나 많으니까. 9시쯤 되면 많아야 두 세명 정도만 남겠지. 사무실에는 할렐루야가 계속 울려퍼지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고 지나가는 시선. 22시가 지나면 사내 혼자 남을 거야. 22시 30분 정도에 작업이 마무리 되지. 컴퓨터와 모니터가 꺼지면서 할렐루야도 함께 끝나고. 적막. 사무실 출입구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 그 전원 코드도 뽑고. 아홉 개의 형광등 버튼을 천천히 차례로 하나씩 누르는 거야. 사무실 구석부터 어둠에 잠겨서, 사무실은 더욱 더 적막해지고, 캄캄해질 거야. 사내가 밖으로 나가며 문이 닫혀. 잠깐. 다시 문이 열리고. 사내가 사무실 안을 들여다 보지. 이미 사무실도 사내도 보이지 않아. 그때. 어둠 속에서 들리는 한마디. “메리 크리스마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들리는 거야. “메리 크리스마스”

뭐,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2010/12/24 00:00 2010/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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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3 (2)

2010/12/23 21:12 / My Life/Diary
이수동
2010/12/23 21:12 2010/12/2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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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3

2010/12/23 09:19 / My Life/Diary
자기가 토해낸 피에 질식해 죽는다. 또다시 내 속으로 침잠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게 나인걸.
2010/12/23 09:19 2010/12/2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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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뭔가 확실한 전기가 필요해. 죄다 끝내버리고 싶어. 이 어마어마하게 그로테스크한 농담을 너무 늦기 전에 모조리 끝장내고 싶어. 하지만 시나 몇 줄 긁적대고 편지 나부랭이나 써봤자 별 소용이 없는 것 같아. ㅡ p.51

내게는 이미 과도한 양심이 주입되어 있어, 파괴적인 후유증 없이는 관습을 파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기심에 가득 차 한계선까지 몸을 쭉 뻗고는, 아무런 근심도 거리낌도 없이 성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고 쉽사리 온전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남자애들을 증오하고, 증오하고, 또 증오하는 수밖에. 나는 이렇게 날마다 질척거리는 욕망에 질질 끌려다니며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데. 정말이지 이런 일 신물이 난다.

… 네게 한때 지나가는 여자가 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기에 이젠 너를 끊어내려 해…. 내가 몸을 줄 사람은, 나의 사상과 정신과 꿈을 먼저 가져야만 해. 하지만 네겐 아무것도 줄 수 없었어.

짝을 찾아 헤매고, 시험을 하고, 시행착오를 하는 이 게임에서는 너무나 많은 상처가 생긴다. 그러다가 별안간 이게 게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뇌리를 강타하면,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거다. ㅡ p.53

이젠 고독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고독감이긴 하지만. 고독은 자아의 형체 없는 핵심에서 나온다. 마치 핏속에 질병처럼 은근히 전신으로 확대되더니 이제 감염 경로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ㅡ p.58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일기장에 글을 쓰지 않은 이유 중엔, 글로 적을 만한 일관된 생각을 단 한 가지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있다. 내 마음은, 역겨울 정도로 적나라한 직유를 들어보자면 마치 파지(破紙)와 머리카락, 썩어가는 사과 심들로 가득 찬 쓰레기통 같다. 너무나 많은 삶들에 접촉했는데, 그 중 너무나 많은 삶들이 흥미진진하고, 내 경험의 영역에 낯설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한 기분이다.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가장자리만 갉아먹어보는데, 그게 마음에 거슬린다. ㅡ p.61

나는 나보다 더 깊이 사유하고, 더 좋은 글을 쓰고, 더 그림을 잘 그리고, 스키도 더 잘 타고, 외모도 뛰어나며, 더 잘 사랑하며, 더 잘 살아가는 이들을 질투한다. ㅡ p.63

항상 능동적이고 행복할 것이냐, 내성적으로 수동적으로 슬퍼할 것이냐, 내게는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아니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미쳐버릴 수도 있다. ㅡ p.71

그래, 분명 너는 지난 18년 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몇 줄의 문장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네들의 인생과 그네들의 소망과 그네들의 꿈까지도 설명할 수 있을까? 해볼수야 있겠지만, 그들의 인생과 소망과 꿈도 결국 너와 다를 바 없을 텐데…. 너 역시 이 설명 불가능한 수수께끼 ㅡ 뒤틀린 긴장과, 비합리적인 사랑과 연대의식과 충성으로 뭉친, 한피를 나누어 출생하고 성장한 이 가족 집단의 일원이므로. 지금의 너를 만들어 낸 데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므로. ㅡ pp.74~75

그런데도 이만큼 완벽하고 흡족한 상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또 고개를 든다. 만일 평생 동안 이 선택을 후회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지금 당장, 아니면 머지않아 결행해야만 할 선택인데, 과연 누가 먼저 용기를 낼 것인가? 마음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만 있다면, 헤어짐이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을텐데.

… 나를 따뜻하게 감싸줄 또 하나의 육체가 얼마나 필요한지! 안식 속에 자리잡은 신뢰감은 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말이야! ㅡ pp.111-112

비록 일상의 쳇바퀴에 지독히도 저항하던 사람이라 해도, 반복되는 생활의 궤도에서 탈선하는 순간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어디로 돌아야 할까? 어떤 매듭, 어느 뿌리를 믿고 매달려야 할까? 집에 돌아온 나는 이렇게 낯설고 희박한 대기 속에서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한 채 공중에 붕 떠 있다…. ㅡ pp.123~124

어디 있는 누구든,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란 게 있기나 한 건가? 아니, 꿈속에서, 혹은 손수 만들거나 다른 이가 만들어준 인공 조형물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없다.

… 도대체 어쩌다 어떻게 네가 성장해 스물한 살 생일에 이르게 되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 나는 사랑받고 싶기에 누군가 사랑하고 싶다. 토끼처럼 두려워, 불빛이 너무 무서워서 자동차 바퀴 밑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바퀴들의 맹목적이고 어두운 죽음 밑에 깔려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아주 피곤하고, 아주 진부하고, 아주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오늘 밤에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쓰러질 때까지 걷다가 집에 돌아가는 불가피한 궤도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좋겠다.

… 나는 혼자 공부하고 혼자 사고한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행동한다. 두 가지 모두를 사랑하며, 두 가지 모두 내게는 소중하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면, 그가 누구인지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 사랑은 환상에 불과하지만, 진심으로 믿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마음을 모두 바칠 텐데. 지금은 마치 깊은 협곡 밑바닥에 드리워진 그늘 한 점처럼 모든 것이 너무 멀고 서글프고 싸늘하게만 느껴지거나, 아니면 분홍색 층층 나무처럼 뜨뜻미지근하고 가깝고 생각 없는 것처럼 보인다. ㅡ pp.177~178

삶의 모든 건 빠짐없이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배짱만 두둑하다면, 또 즉흥적인 상상력만 있다면. 창조력에 있어 최악의 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야. ㅡ p.186

나는 항상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를 찾는 발소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실망하곤 한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한동안만이라도 금욕하는 고행자가 될 수 없을까? 왜 항상 작업과 독서를 위한 철저한 고독의 문간에서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며, 또 한편으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길과 말, 그 몸짓을 이토록, 이토록 그리워하는 것일까? ㅡ p.235

더는 자포자기도 말고 위안을 찾아 명예를 내던지는 일도 말자. 술로 도피하거나 낯선 남자를 만나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자. 약해지지 말고 날마나 속으로 피를 흘린다고 하소연하지도 말자. 날마다 핏방울이 뚝뚝 흐르고, 흐른 피가 모여 엉겨 붙는 고통을 하소연하지도 말자.

… 내가 가장 쇠약해져 있을 때 나를 찾아오는 무수한 절망들 ㅡ p.261~262

ㅡ 실비아 플라스 (김선형 옮김),『일기』, 문예출판사
2010/12/23 00:31 2010/12/2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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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성인의 모든 인간관계는 이전 감정의 재편집이며, 아이가 생후 초기 어머니와 나눴던 유대감과 자라면서 오이디푸스 갈등과 관련해 아버지에게 느꼈던 감정이 바로 사랑의 끌림으로 재현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게 ‘모든 사랑은 재발견’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랑은 무의식의 운명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무의식에서 갈망하던 대상이 바로 그 사람이며, 그리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이 내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어떤 대상에게 갑자기 빠져 들게 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처음에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매우 조건적으로 빠져 든다. 그러니까 운명적인 만남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특히 첫눈에 반하는 사랑의 경우 그 대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그리고 있던 연인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이며, 자신의 내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부모와 같은 유형을 찾는 경우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나,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모상이 엿보이는 상대에게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 구원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대상, 혹은 반대로 구원받고 싶은 자기를 돌봐 줄 수 있는 대상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ㅡ pp.25~26

사실 열 사람이 어떤 사건을 동시에 목격한다 해도, 그들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기억이라는 것은 그것이 저장될 당시의 그대로가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될 때, 그것은 본질과는 조금 다르게 변형되어 저장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변형되어 기억의 창고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형된 기억이 훗날 그걸 회상할 때 또 한 번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 즉 회상하는 시점의 소망과 욕망, 감정, 느낌 등이 기억을 떠올리는 데 개입하는 것이다.

때로 기억과 상상을 혼동하는 수도 있다. ㅡ p.87

소녀들은 자신을 돌봐 주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도 어머니가 됨으로써 여성성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은 소녀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여성은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여성들은 일찍부터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그와 함께하길 꿈꾼다.

하지만 남자들은 다르다. 남성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해 자율성을 획득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여자처럼 사랑이 그들에게 우선 가치가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군대에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까지 부모에게 의존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남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지운다. 남자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을 통한 진정한 자율성과 심리적 자유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남녀 모두 사랑보다 일을 해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그 이후로 밀려나고 있다. 만혼이 유행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ㅡ p.129

하지만 누구에게나 사랑이 축복인 건 아닌 것 같다. 윌이 처음에 그랬듯 사랑이 다가와도 그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 버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초반에 윌을 지켜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하지 않을까?’

스칼라 같은 좋은 사람이 다가왔는데도 윌은 그 사랑을 거부했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아주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윌은 나중에 스스로 스칼라를 찾아간다. 자신이 더 이상 버림받아 마땅한, 나쁘고 못난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사랑받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ㅡ p.166

‘신뢰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프로이트는 그 답을 아기 때 엄마와 이루는 관계에서 찾는다. 즉 신뢰는 엄마와 내가 분리된 독립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우울함에 빠졌다가 그것을 극복해 내는 과정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와의 완전한 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인 생후 2년까지 엄마를 찾는데, 이때 늘 엄마가 옆에서 반응을 보여 주고 안심시켜 준다고 해 보자. 아기는 자신이 혼자 놀고 있어도 엄마가 어디 도망가지 않고 내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 즉 ‘기초적 신뢰(basic trust)’를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최초로 배우는 ‘신뢰’다.

어쩌면 누군가는 최초로 신뢰를 배우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신뢰를 못 배웠을 수도 있다. ㅡ pp.178~179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할 때 환자에게 으레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배우자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좌절을 견디는 능력, 적어도 타인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준다. 사랑을 마음의 키를 재는 척도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ㅡ p.250

ㅡ 김혜남,『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걸까?』, 갤리온
2010/12/22 23:53 2010/12/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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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女生徒)

2010/12/22 02:36 / My Life/Diary
 



‘본능’이라는 말과 부딪히면 왠지 울고 싶어진다. 우리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본능의 어마어마한 힘이라는 것을 번번이 확인하게 될 때면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해진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그저 엄청나게 커다란 무언가가 내 머리 위를 덮으며 내려와서 제멋대로 끌어내 돌려버리는 것이다. 끌려가면서 만족스러워하는 기분과 그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또다른 감정. 우리는 왜 혼자 만족하고 평생토록 자신만을 사랑하며 살 수 없는 걸까? 지금까지의 자신의 감정과 이성이 본능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잊은 뒤에는 그저 실망만이 남을 뿐이다. 이런 내 자신에게도 저런 내 자신에게도 본능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슬픈일이다. 엄마, 아빠를 힘껏 부르고 싶어진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의외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곳에 있을지도 모르기에 더더욱 슬퍼졌다. ㅡ p.173

책 읽는 건 그만 때려치워! 관념뿐인 생활이야. 무의미하고 시건방지게 아는 척하는 것도 밥맛이야. 나에게는 생활의 목표가 없다.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좀더 적극적이면 좋으련만 나에게는 모순이 많다. 한껏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에 빠져 있는 척하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그저 시시한 감상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위로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해. ㅡ p.178

아무도 우리들의 괴로움을 알아주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 이 괴로움과 외로움은 아름다운 추억쯤으로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어른이 될 때까지 이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홍역 같은 것인가.

하지만 홍역으로 인해 죽거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냥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우리 중에는 매일 이렇게 가슴 답답해하고 화를 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몸으로 평생을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마음을 굳게 먹고 자살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안타까워한다. 아아, 조금만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었을 것을, 조금만 더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너무도 괴로운 상황을 겨우겨우 참아 넘기며 뭔가 세상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세상은 그저 아무 영양가도 없는 교훈만 들려주며 위로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 기대에 배신당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쾌락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너무나도 먼 산을 가리키며 저기에 올라가면 경치가 좋다고 말하면 그것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밀려오는 맹렬한 복통 때문에 그곳까지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복통을 보고도 못 본 척 “자 조금만 참으면 돼, 저 산 정상까지만 가면 다 해결돼” 하고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다. 분명 누군가가 틀렸다. 나쁜 것은 바로 당신이다! ㅡ pp.208~209

오늘과 같은 내일이 찾아오고, 행복은 평생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알지만 분명 올 거야. 내일이면 찾아올 거야 하고 믿으며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지? 털썩 커다란 소리를 내며 이불 위로 쓰러졌다. 아아, 기분 좋다. 차가운 이불 위에 드러눕는다. 등이 시원해져서 무작정 기분이 좋았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는 말이 얼핏 생각난다. 행복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 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버렸다. 바로 다음날 멋진 행복의 소식이 빈집을 찾아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다. 행복은 하룻밤 늦게 찾아온다. 행복은. ㅡ p.210

ㅡ 다자이 오사무 (김욱송 옮김),「여학생」,『달려라 메로스』, 숲
2010/12/22 02:36 2010/12/22 02:36

금수(禽獸)

2010/12/22 02:03 / My Life/Diary
그는 10여 년 전에 지바나코하고 정사(情死)를 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을 정도이니까,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독신으로 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생활에 떠오르는 물거품처럼 덧없는 꽃과도 같은 상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희망은 누군가가 다른 데서 가져다 주기라도 하는 듯이 멍하니 남에게 자기의 몸을 내맡기고 있고, 또한 그런 현실에서는 살아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지바나코는 같이 정사할 대상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느껴졌다. 과연 지바나코는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여느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 한 가지의 주문을 했다.

“옷자락이 펄럭거린다고 하니까 발을 꽁꽁 묶어 주세요.”

그는 가느다란 끈으로 묶으면서 그녀의 발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새삼스럽게 놀라며,

“그 녀석도 이런 아름다운 여인하고 죽었다고들 말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드러눕더니 무심히 눈을 감고 목을 약간 폈다. 그러고는 합장을 했다. 그때 그는 번개처럼 허무의 고마움을 느꼈다.

“아아, 죽는 게 아니야.”

그는 물론 죽일 생각도 죽을 마음도 없었다. 지바나코가 진정이었는지 장난하는 마음이었는지는 모른다. 그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여름의 오후였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에 몹시 놀란 나머지, 그 후부터 자살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고 또한 입에도 담지 않게 되었다. 가령 어떠한 일이 있든지 이 여자를 고맙게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때 그의 마음속에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ㅡ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경룡 옮김),「금수」,『설국』, 문예출판사, pp.225~226
2010/12/22 02:03 2010/12/22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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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雪國)

2010/12/22 01:56 / My Life/Diary
그럴 때에 그녀의 얼굴 한가운데에 등불이 켜진 것이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지워 버릴 만큼 선명한 것은 아니었다. 등불도 영상을 지워 버리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등불은 그녀의 얼굴 속으로 흘러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밝혀 주지는 못했다. 차갑고 먼 빛이었다. 작은 눈동자의 언저리를 발그레하게 밝혀 주면서 마침내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지는 순간, 그녀의 눈은 땅거미의 물결 사이에 떠 있는 기묘하게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ㅡ p.15

“하지만 우리 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죠. 다만, 그것뿐이에요.”

“소꿉친구로군.”

“그래요. 하지만 따로따로 지내 왔어요. 도쿄로 팔려 갈 때, 오직 그 사람 혼자 전송해 주었어요. 가장 오래된 일기의 맨 첫머리에 그 사실이 씌어 있는 걸요.”

… “당신이 도쿄에 팔려 갈 때, 혼자서 전송해 준 사람이 아닌가? 가장 오래된 일기의 첫머리에 씌어 있는 그 사람의 최후를 전송하지 않으려는 법이 어딨어? 그 사람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당신을 기록하러 가야해. ”

“싫어요. 사람 죽는 꼴 보는 게.”

그것은 차디한 박정함으로도, 너무나 뜨거운 애정으로도 들리는 것이어서 시마무라는 망설이고 있노라니까,

“일기 같은 건 이젠 쓸 수 없어요. 태워 버리겠어요.” 하고 고마코는 중얼거리는 사이에 웬일인지 볼이 발그레 물들면서,

“당신은 참 순진한 분이네요. 순진한 분이라면 내 일기를 몽땅 부쳐 드려도 좋아요. 당신, 날 비웃지 않겠죠? 당신은 순진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ㅡ pp.63~78

그는 곤충들이 괴로워하다가 죽어 가는 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가을 날씨가 차가워짐에 따라 그의 방의 다다미 위에서 죽어가는 벌레도 매일같이 있었던 것이다. 날개가 단단한 벌레는 벌렁 나동그라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벌은 조금 기어가다가 나뒹굴고 다시 기어가다가는 쓰러졌다. 계절이 바뀌듯이 자연스럽게 멸망해 가는 조용한 죽음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니 다리나 촉각을 바르르 떨면서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벌레들의 작은 죽음의 장소로써 8조의 다다미는 대단히 넒은 것처럼 보였다.

시마무라는 주검들을 버리고자 손가락으로 집어들면서 집에 남겨 두고 온 어린 것들을 퍼뜩 생각하는 때도 있었다.

창밖의 방충망에 언제까지나 달라붙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 그것은 죽어 있어서 가랑잎처럼 흩어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손에 집어들고는 이렇게 아름답게 생겼을까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ㅡ p.118

“아냐, 당신 같은 분의 손에 걸리면, 저앤 미치광이가 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내 짐을 가져가지 않을래요?”

“어지간히 해 두지.”

“취해서 투정을 부리는 줄 아세요? 저애가 당신 곁에서 귀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난 이 산 속에서 신세를 망쳐 버리죠. 조용히 좋은 기분으로요.” ㅡ p.127

“떨어지기 싫어서인 것도 아니고 헤어지기 싫어서인 것도 아니지만, 고마코가 자주 만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버릇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고마코가 안타깝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살아 있지 않은 듯한 가책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허전함을 바라보면서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었다. 고마코가 자신 속에 빠져 들어오는 것이 시마무라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마코의 모든 것이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시마무라의 어느 것도 고마코에게는 전해진 것 같지 않다. 고마코가 내는 공허한 벽에 부딪히는 메아리와 같은 소리를 시마무라는 자신의 가슴속에 눈이 내려 쌓이는 듯이 들었다. 이와 같은 시마무라의 제멋대로 구는 태도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이젠 절대로 이 온천에는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ㅡ pp.138~139

ㅡ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경룡 옮김),「설국」,『설국』, 문예출판사
2010/12/22 01:56 2010/12/22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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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다 부질없네...

결국 나를 위한 거니까. 전적으로 이기적인.

답답하다는 건 슬프다는 거야. 그런데 아무도 없어.

하고 싶었던 말은, 다만 이것뿐이었어...

어지간히 병신짓이네.
2010/12/21 19:01 2010/12/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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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2010/12/20 20:49 / My Life/Diary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영화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고, 제목이,
갑자기 생각났네….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데이빗 보위의 말라버린 머리통과 한줌 머리카락 뿐.
2010/12/20 20:49 2010/12/20 20:49

2010.12.19 (2)

2010/12/19 12:32 / My Life/Diary
한 여자의 목소리. 2003년 2월. 대구에서 어떤 미친 사람이 지하철에 불을 낸 그날. 나는 집에 있었다. 쉼 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긴급 뉴스. 그때, 갑자기, 정말 갑자기, 한 여자가 이름과 나이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끝났다 싶었는데, 네 사람, 다섯 사람, 확인 불명, 여섯 사람. 여자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일곱 사람, 여덟 사람. 확인 불명. 여자가 울었다. 사고에 사고. 꺼져버린 여자의 마이크. 라디오 전원 버튼을 누르던 내 집게 손가락. 2003년, 내가 가진 기억의 전부. 그 여자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목소리, 다시 듣고 싶어. 2003년, 다시.
2010/12/19 12:32 2010/12/19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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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가웠어, 존.


2010/12/19 00:33 2010/12/19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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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2010/12/18 15:30 / My Life/Diary
나는 죽음이 그와 같은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위험한 고비에 고비를 거친 뒤 갑자기 한꺼번에 설명되고 정당화되고 구원받는, 인생에 대한 짤막한 비전, 뒤엉킨 두뇌 회로 속에 나타나는 일종의 최후의 심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내가 실제로 얻은 것은, 머리 속의 텅 빈 공동, 완전한 제로, 무(無)였다. 나는 속았던 것이다.

몇 달 뒤 나는, 내 나름대로의 해답을 결국은 얻었음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나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해 간 절망감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절망감, 마치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무분별한 어린애가 느끼는 것 같은 해결 불가능한 절대적인 절망감이었다. 그런데 유치하게도 나는, 죽음이 그러한 절망감을 종식시켜 줄 뿐 아니라, 설명까지 해 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결국, 죽음이 나를 거부했을 때,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은 내가 틀린 어법을 사용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절망감이라는 것을 미국식으로 번역했던 것이다. 너무도 많은 미국 영화, 미국 소설, 그리고 미국으로의 잦은 여행이, 내가 이해하고 있던 것을 낙천적인 낯선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나는 불행하다>를 <내겐 문제들이 있다>로 바꿔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낙관주의적 표현 방법이다. 왜냐하면 문제라는 것은 반드시 해답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이란 그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조건, 곧 기후와도 같은 것이다. 어떠한 해답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죽음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나자 놀랍게도 나는, 내 스스로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크게 상관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문제들>도, <문제들의 문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체가 이미 행복의 시작이었다.

자살에 관해서 말하자면, 자살을 하나의 병으로 얘기하는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는, 자살은 가장 악독한 대죄(大罪)라고 부르는 가톨릭교도나 모슬렘 교도만큼이나 나를 당황시킨다. 내가 보기엔 자살은, 그것이 도덕을 초월한 문제인 것과 똑같이 사회학적ㆍ심리학적 예방을 초월한 문제이며, 강요당한, 궁지에 몰린, 어긋난 숙명에 대하여, 우리들이 때로 스스로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그러나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 같다.

그러나 자살은 나의 몫이 아니다. 이젠 아무래도 이전처럼 낙관주의적인 사람은 못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죽음은 그것이 최후로 닥쳐왔을 땐, 어쩌면 자살보다 더욱 불결하고, 틀림없이 자살보다 상당히 더 불편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ㅡ 알프레드 알바레즈, 『자살의 연구』, 청하, pp.283~286
* 행갈이 및 본문 몇 부분을 다소 바꾸었음.
2010/12/18 15:30 2010/12/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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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8 (2)

2010/12/18 02:08 / My Life/Diary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결혼한다고 해서 '참선'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오로지 '나'를 생각하게 된다."


현각 스님,「현각이 한국을 떠난 까닭은?」,『조선일보』, 2010.12.11

2010/12/18 02:08 2010/12/18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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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8

2010/12/18 01:30 / My Life/Diary
가난한 죽음 속으로 들어가보다 (김기태ㆍ정용일, 2010.12.17 제840호, 한겨레21)
“생의 마무리를 성가복지병원에서 할 수 있었던 5명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일지 모른다. 이곳에서는 수녀와 간호사, 자원봉사자가 고인들이 세상 떠나는 길을 전송했다. 또 상대적으로 질 좋은 숙식과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보장받았다. 이들은 전국 157만 명에 이르는 기초생활수급권자 가운데 극히 일부 사례일 뿐이다. 이 5명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며 생의 마지막을 맞을까.”
2010/12/18 01:30 2010/12/1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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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7

2010/12/17 17:39 / My Life/Diary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누구든 떠나게 되있다. 나는 열심히 버티기만 하면 돼. 그리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아도, 이런 일에는 금방 전문가가 되는 거야. 5년이나 10년 뒤에는 또 누군가를, 무언가를 무척 아쉬워하면서 절망하겠지. “내 30대는 끝났다” 따위를 중얼거리면서. 아아, 이런, 나는, 비겁하다.

일해. 일해. 돈이라도. 벌어.
2010/12/17 17:39 2010/12/1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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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2010/12/16 23:17 / My Life/Diary
구석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어. 집으로 오는 길, 지하철 안에서. 어떤 여자가 노래를 부르더라고. 내 바로 뒤에서. 들릴까 말까 싶을 정도로. 조곤조곤. 무슨 노랜지는 모르지만. 아ㅡ 너무 사랑스러워. 책 내용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차마 눈을 뗄 수가 없더라. 도망치듯 지하철에서 내려서는 개찰구까지 고개에 빳빳이 힘을 주고 걸었어. 고개를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쌓였지. 무슨 노래인지도, 어떤 여자인지도 모른 채, 지나가 버려야 한다고... 뭐, 좀, 병신 같지만.

그나저나. 눈이 날리고 있네... 조금씩.
2010/12/16 23:17 2010/12/16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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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편지
권정생

하느님,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 만날 저는 입으로 수없이 부르면서 막상 붓을 들고 편지를 쓰려니 무척 어렵습니다. 분명히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십니까?

커다란 부자 나라의 아버지도 되고, 조그맣고 가난한 그런 나라의 아버지도 되신단 말씀입니까?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풍속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모양도 다른 그런 나라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느냐 말씀입니다. 너무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집 옆에 납작하고 누추한 조그만 집, 거기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짜 아버지라고 하느님 자신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땅 위의 사람 아버지도 애비 노릇하기가 참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도 보통 힘드는 게 아닐 것입니다. 짚신이 잘 팔리면 나막신 장수 아들이 애처롭고, 나막신이 잘 팔리면 짚신 장수 아들이 애처로운 어느 어머니처럼, 하느님 아버지도 만날 전전긍긍 불안하게 지내시겠지요.

정말 지난 일년동안 너무도 괴로운 일이 많았습니다.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게 된 그것부터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저는 올해 새로 집을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빌배산이라는 얕으막한 산 밑에 공지(空地)가 있어 두 칸짜리 집을 지었습니다.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무척 따뜻합니다. 언덕배기이고 그리고 풀밭 가운데이기 때문에, 집 둘레에 여름내 가으내 꽃들이 피었습니다.

개울가로는 달개내꽃 여뀌꽃이 피었고, 산이 있는 바위기슭엔 부채꽃과 패랭이꽃이 피었었지요. 그리고 집 앞 풀밭에는 토끼풀꽃, 쑥부쟁이꽃, 가을엔 냇가고 산기슭이고 가리지 않고 온통 들국화가 꽃밭처럼 피어났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참으로 들꽃은 착하고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곳 빌배산 밑에 혼자 살면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고 불쌍한 목숨이구나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선 가장 귀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착한 것은 들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도, 이 보잘것없는 빌배산 언덕배기를 항시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거기 조그맣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시며 하느님도 그 조그만 꽃처럼 착한 하느님이 되실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면서, 그 세우시는 과정에서, 참 많은 사람을 죽게 하신 하느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서운 하느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리고가 박살이 나고, 아이성 사람들이 전멸이 되고, 헷과 아모리와 가나안과 브리즈가 전멸되고, 막케다가 부서지고 라기스를 해치우고….

그것은 너무도 엄청나고 무자비한 죽임이었습니다. 이러고 보면 하느님은 참 하느님도 아니고, 사랑의 하느님도 아니고, 폭군 하느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일찍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했던 스페인과 영국은 참 위대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게 되었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전쟁터마다 찾아다니시며 이기는 편에 앞장서 주셨습니다.

하느님, 이렇게 하느님은 힘센 쪽의 하느님이시고 이기는 쪽의 하느님이시니 힘없고 불품없는 이들은 너무도 가엾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 “하느님, 하느님 나를 버리시옵니까?”하고 애절하게 부르짖던 것을 하느님도 들으셨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약한 이들은 폭력에 의해 죽어가면서 하느님께 슬프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왜 힘없는 사람, 죄없는 사람, 착한 사람을 이렇게 죽도록 버려두느냐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 죽이는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지요. 오히려 더 크게 잘난 척, 막되게 폭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래도 좋은 것입니까? 이것이 진정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입니까?

전쟁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을 잃은 사람, 가족을 잃는 사람, 불구가 되는 사람, 가지 가지 슬픈 일은 한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심장이 얼마나 강하시기에 아무렇지 않게 보고만 계시는지요?

저희 집이 있는 건너 마을에 아주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쉰 살이 넘었으니 곧 할머니가 되겠지요.

남편은 일찍 죽어 없지만 자식이 여섯 남매가 되는데, 모두 밖으로 나가버리고 아주머니 혼자 살고 있습니다. 뒷산 비탈을 쪼아 고추도 심고 참깨도 심으며 고되게 일합니다. 자식들에겐 조금도 도움을 받지 못하니까요. 도움은 커녕 자식들은 번갈아 아주머니에게 더 많이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서 오는 편지는 매번 걱정거리뿐입니다.

지금 맏아들은 사우디에 나가 있습니다. 둘째도 아들이지만 리비아라는 곳에 노무자로 가 있습니다. 세째는 딸인데 일찍부터 서울 식모살이로 있다가 흑인 병사와 결혼을 해서 지금 하와이에 살고 있습니다.

네째도 딸인데 어떤 남자와 사귀어 아들까지 낳았지만 그 남자에게 버림받고 애기도 어느 아동복지 사업하는 곳에 맡겨 버렸습니다. 네째는 어머니에게 많은 돈을 빚지게 해 놓고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이 뜸합니다.

다섯째는 아들인데 역시 도시의 공장에 가 있습니다. 막내도 딸인데 아직까지는 착하게 살고 있다고 가끔 편지가 옵니다.

네째까지 결혼을 해서 자식들을 낳고 살지만 하나도 정식 결혼식을 올린 아들 딸이 없습니다. 아주머니는 아무렇게나 버려져 살고 있는 자식들이 가엾고 한없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아주머니는 이 모든 불행이 지난 번 한반도에 있었던 6ㆍ25 전쟁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이 전쟁으로 몸을 다쳐 상이병으로 제대했고, 그래서 일찍 죽었다고 항상 말하며 한숨짓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땅엔 아주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다고 뭐 더 관심 있게 보아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제발 전쟁하는 사람들의 편은 무조건 들어주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무시무시한 미사일이니 핵폭탄이니 뭐 헤아릴 수 없는 전쟁무기가 자꾸만 쌓여가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평화 유지군이란 이상한 군대도 생겼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 무기가 필요하다고 한답니다. 참 뻔뻔스러워졌습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고, 이리로 끌고 가고 저리로 끌고 가고, 자기들 멋대로 부려먹는다고 하더군요. 정말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줄다리기를 하듯이 하느님을 놓고 잡아당기면 아무래도 힘센 쪽으로 끌려가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은 하느님 아버지가 아주 신용이 없어졌답니다. 돈장이 하느님, 권력장이 하느님, 폭력 하느님, 어떻게 보면 하느님도 신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쓸쓸하답니다.

하느님마저 이 세상의 힘센 사람들에게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이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으니까요.

하느님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려주십시오.

지금은 깨어날 때인데, 하느님께서 도리어 정신없이 나쁜 곳에 이용만 당하시고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곳 빌배산에 피어나는 들꽃처럼 착한 사람이 아직도 많지 않습니까? 하느님 그러니까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이 세상 끝까지, 그늘진 겨레의 한숨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아프리카의 비아프라에서의 그 참혹했던 지난 날을, 월남 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 캄보디아의 난민들, 엘살바도르에서, 팔레스틴에서, 불쌍한 사람들은 한없이 한없이 울고 있습니다.

하느님, 우리 한반도의 휴전선도 하느님이 상관해 주십시오. 우리 6천만 겨레들이 이토록 한 마음으로 빌고 있습니다.

제발 제발 무시무시한 군대들을 거둬 가 주시고, 무기를 거둬 가 주시고, 그리고 나쁜 사람들의 힘을 거둬 가 주십시요.

진짜 하느님이라도 분명히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서러운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십시요.

하느님 이 해가 저물어 갑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까마득한 옛날에 보내주신 외아들이신 예수님의 간곡한 기도가 꼭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결코 하느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셨고, 우리 가난한 겨레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이 빌배산 밑 외딴 집에 홀로 살고 있는 저도 즐겁게 아름다운 얘기를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여태까지 써온 슬픈 이야기가 아닌 즐거운 얘기를 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 힘내 주실 것을 꼭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오늘 밤부터 별을 쳐다보며 기다리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ㅡ『권정생 이야기2』, 한걸음
2010/12/12 23:25 2010/12/1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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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2010/12/10 11:47 / My Life/Diary
똥 싸고 일어나서 고개를 딱 돌렸는데 똥이 없을 때 불현듯 엄습하는 외로움. 저의 외로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아, 인간은 왜 이리도 외로워 해야만 하는 걸까요. 사미자 여사와 쌈바춤을 추며 흑장미가 세월 속에서 더욱 더 붉어져 가는 까닭을 논하고 싶습니다.
2010/12/10 11:47 2010/12/1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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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3)

2010/12/08 17:37 / My Life/Diary



다이앤 키튼 나오는 영화 보고 싶어. 우디 앨런이 나불대는 거면 더 좋고...

위험해. 지금. 너무. 헛소리.
2010/12/08 17:37 2010/12/08 17:37

2010.12.08 (2)

2010/12/08 09:18 / My Life/Diary
눈이. 내리네. 결국.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서정주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運命)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부룩이 도란그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山도 山도 靑山도 안기어 드는 소리, ……

괜찮아. 안 괜찮아도 괜찮아.
2010/12/08 09:18 2010/12/0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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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2010/12/08 08:00 / My Life/Diary
“인비인(人非人)이라도 상관없잖아요. 우리는,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걸요.”
ㅡ『비용의 아내』, 다자이 오사무

새벽에 씻으면서 거울을 보는데 문득, 살이 빠진 것 같더라. 쭈그려 앉아서 무릎이며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혼자 밥 먹기 그렇지? 앞에 앉아서 먹는 거 보고 있을께. 갈래?”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한다. 배가 고파. 수챗구멍에 걸린 머리카락을 건져낸다. 창밖도 텅 비어 있다. 눈이 많이 온다더니, 거짓말이었어. 먹지 않을래.

괜찮아. 살아 있으니까.
2010/12/08 08:00 2010/12/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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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2)

2010/12/07 09:00 / My Life/Diary
Lovers le Strange Album Cover, Expatriate
2010/12/07 09:00 2010/1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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