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Articles, Search Results for 'Other Scraps/Articles'

  1. 2006/07/03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성공의 법칙
  2. 2006/04/05 유명인사 100인의 좌우명
  3. 2006/03/31 韓美日야구사에 길이 남아있는 명언
  4. 2006/01/31 태터툴즈는 가장 아름답게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
  5. 2005/10/09 Ally McBeal
  6. 2005/10/03 명언, 명구
  7. 2005/09/27 서울, 경인지역 - 라디오 주파수 목록
  8. 2005/05/22 자경문(自警文)
  9. 2005/04/15 君不見
  10. 2005/03/26 박이문 /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물음
  11. 2004/12/03 숭산스님의 미국인 여성 제자 성향 선사
  12.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9
  13.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8
  14.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7
  15.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6
  16.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5
  17.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4
  18.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3
  19.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2
  20. 2004/12/0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1
  21. 2004/12/02 숭산스님 마지막 인터뷰-'오늘 이땅을 살아가는 지혜'
  22. 2004/12/01 걱정마라, 만고광명이 청산유수니라
  23. 2004/12/01 숭산 큰 스님을 추모하며, 현각
  24. 2004/11/30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5
  25. 2004/11/30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4
  26. 2004/11/30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3
  27. 2004/11/30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2
  28. 2004/11/30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1
  29. 2004/10/22 헌법재판소 수도이전법 위헌결정 전문
S = X + Y + Z


S = 성공

X =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Y = 생활을 즐길 것

Z = 한가한 시간을 가질 것

2006/07/03 16:28 2006/07/03 16:28

01.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 - 재물에 있어서는 물처럼 공평하게 하라
02. 유기회사 이승훈 창업주 - 땅속의 씨앗은 자기의 힘으로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온다
03. 경주 최 부잣집 백산상회 최준 창업주 -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04. 유한양행 유일한 창업주 -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05.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 창업주 - 신의, 성실, 근면


06. 샘표식품 박규회 창업주 - 옳지 못한 부귀는 뜬구름과 같다
07. 코오롱그룹 이원만 창업주 - 공명정대하게 살자
08. 경방그룹 김용완 명예회장 - 분수를 알고 일을 즐긴다
09. 효성그룹 조홍제 창업주 - 덕을 숭상하며 사업을 넓혀라
10.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 - 수신제가치국평천하


11. LG그룹 구인회 창업주 - 한 번 사람을 믿으면 모두 맡겨라
12. 쌍용그룹 김성곤 창업주 - 인화(人和)가 제일 중요하다
13.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4. 벽산그룹 김인득 창업주 -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15. 교보생명 신용호 창업주 -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다


16. 대림그룹 이재준 창업주 - 풍년 곡신은 모자라도 흉년 곡식은 남는다
17. 개성상회 한창수 회장 - 아름답고 평범하게 살자
18. 한진그룹 조중훈 창업주 - 모르는 사업에는 손대지 말라
19. 대상그룹 임대홍 창업주 -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
20. 한화그룹 김종희 창업주 - 스스로 쉬지 않고 노력한다


21. 롯데그룹 신격호 창업주 - 겉치레를 삼가고 실질을 추구한다
22. SK그룹 최종현 회장 - 학습을 통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23. 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 - 차라리 책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거지가 낫다
24. 두산그룹 박용곤 명예회장 - 분수를 지킨다
25. 금호그룹 박정구 전 회장 - 의가 아닌 것은 취하지 말라


26.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 -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자
27. 두산그룹 박용오 회장 -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한다
28. 우리금융그룹 윤병철 회장 - 아직 배가 12척이나 있고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29. 광동제약 최수부 회장 -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끝까지 완수하자
30. 미래산업 정문술 창업주 - 미래를 지향한다


31.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 -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
32. 두산중공업 윤영석 부회장 -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33. 캐드콤 김영수 대표 - 충분히 생각하고 단호히 실행하라
34. 아티포트 김이현 회장 -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무리를 불러모은다
35. SK텔레콤 조정남 부회장 - 하는 일마다 불공을 드리는 마음으로 대하라


36. 동양화재 정건섭 대표 -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
37. 연합캐피탈 이상영 대표 - 물은 모두를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38. 삼우무약 이성희 회장 - 이득은 적당히 탐해야 한다
39. 원일종합건설 김문경 회장 -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40.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 경청


41. 현대모비스 박정인 회장 - 인내
42. LG칼텍스정유 허동수 회장 -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
43. 코오롱건설 민경조 대표 - 덕은 외롭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44. 한국타이어 조충환 대표 - 밝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지니자
45. 현대산업개발 이방주 대표 - 우주는 무한하고 인생은 짧다


46. 삼성물산 배종렬 대표 - 깊은 강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47. 현대아산 김윤규 대표 - 부지런하면 굶어 죽지 않는다
48. 만도 오상수 대표 -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49. KT 이용경 대표 - 노력한 만큼 거둔다
50. LG그룹 구본무 회장 - 약속은 꼭 지킨다


51.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 -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52. 벽산 김재우 대표 - 계획은 멀리 보되 실천은 한 걸음부터
53. 아시아나항공 박찬법 대표 - 효도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다
54. 한라공조 신영주 대표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55. 재능교육 박성훈 회장 - 교육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살자


56. 삼성전자 이윤우 부회장 - 단순한 것이 최고다
57. 대우인터내셔널 이태용 대표 -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린다
58. OTIS·LG 장병우 대표 - 걷고 또 걷는다
59. 휠라코리아 윤윤수 대표 - 정직
60. 한세실업 김동녕 대표 - 한 걸음 늦게 가자


61. 삼성테스코 이승한 대표 - 넓고 깊게 안다
62.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 -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63. LG화학 노기호 대표 - 선(善)을 따르는 것이 물의 흐름과 같다
64. 대우일렉트로닉스 김충훈 대표 - 생행습결
65. 신한카드 홍성균 대표 - 모든 일은 즐겁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66. 포스틸 김송 대표 -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67. 골든브릿지 정의동 회장 - 아는 것도 어렵고 행하는 것도 쉽지 않다
68.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 지고 이겨라
69. KT네트웍스 이경준 대표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70. 유한킴벌리 문국현 대표 - 세 사람이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71. 대교그룹 강영중 창업주 - 가르치고 배우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
72. 동양시스템즈 구자홍 대표 - 기본에 충실하자
73.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 - 병사가 교만하면 싸움에서 반드시 진다
74. 코스닥증권시장 신호주 사장 - 주인의식을 갖고 추구하면 참됨을 이룰 수 있다
75. TYK그룹 김태연 회장 - 하면 된다


76. 광혁건설 신현각 대표 - 인정을 베풀면 훗날 좋은 모습으로 볼 수 있다
77. 아산재단 정몽준 이사장 - 화합은 하지만 부화뇌동은 하지 않는다
78. 이니시스 이금룡 대표 -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자
79.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 - 죽을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산다
80.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81. 국순당 배중호 대표 - 원칙이 곧 지름길이다
82. 하나투어 박상환 대표 -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는 발전이 없다
83. 마리오 홍성열 대표 - 준비를 하면 근심할 것이 없다
84.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 매순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자
85. 한솔그룹 조동길 회장 - 겸손하게 살자


86. 로만손 김기문 대표 -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87.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 -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살자
88. CJ CGV 박동호 대표 - 촌음도 나의 것
89. 미래에셋그룹 박현주 회장 - 독수리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호랑이는 앓는 듯이 걷는다
90. SK 최태원 회장 - 실천이 중요하다


91. 휴맥스 변대규 대표 - 깊이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자
92. 파이언소프트 이상성 대표 -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라
93.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대표 - 남보다 시간을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
94. 웅진식품 조운호 대표 -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
95. 태평양 서경배 대표 - 정성을 다하여 노력한다


96. NHN 김범수 대표 - 꿈꾸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97. SK텔레콤 가종현 상무 - 범사에 감사하라
98.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 떳떳할 수 있게 살아야 한다
99. 웹젠 김남주 대표 - 디지털 세상에 선(禪)을 창조한다
100. 컴투스 박지영 대표 - 모든 사람에게 배울 점이 있다

101. 힘센자산운용 히로 대표 - 묻어가다보면 해뜰날 있다..ㅋ

2006/04/05 03:36 2006/04/05 03:36

전설적인 야구선수 루게릭은 은퇴식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쓸쓸히 경기장을 떠났다. 얼마 후 루게릭은 근위축성 측삭경화증(루게릭병)이라는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남긴 명언은 야구팬들에게 자주 회자되곤 한다.

그럼..지금부터 韓美日야구사에 길이 남아있는 명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메이저리그
톰 글래빈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조쉬 깁슨
"죽음이란 아웃코스를 순식간에 지나가는 패스트볼과 같은 것이다."
(You can't tell me nothing about death. Death ain't nothing but a fastball on the outside corner.)

조 토레
"우리는 인간이다. 그(페드로 마르티네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졌다."

요기 베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 It's Over)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당신은 결국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가게 된다."
"슬럼프? 그건 3할치는 타자한테나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 선수는 양키스의 일부였다. 마치 피를 나눈 형제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팀워크가 탁월했고, 늘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이것이 양키스의 문화였다."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내 긴 생애에서 깨달은 5가지의 수칙입니다.
첫째.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손을 놓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너무 늦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둘째 기회를 포착하십시오. 셋째. 다수를 따라 다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는 당신의 생각이 가장 중요합니다.
넷째. 항상 긴장하십시오. 다섯째. 무슨 일을 할 때나 항상 정신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베이브 루스
"내가 날린 수많은 홈런 중에서 의식하고 때린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의 유일한 스포츠는 야구다."
"모든 베이스라인이 오르막길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때엔, 모든 야구선수들은 그만두어야만 한다."
"만약 야구가 없었다면, 난 교도소나 묘지에 있겠지."
"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1루, 2루, 3루 베이스를 차례로 밟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그 많은 홈런을 칠 수 있었던 이유는 139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샌디 쿠팩스
"그가 던지고자 하는 공을 던지는 사람, 이것이 좋은 투수의 정의이다."
"투수는 아웃카운트를 늘림으로써 승리투수가 되는 것이지 삼진을 많이 잡는다고 승리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경기는 깨끗함을 가졌다. 만약 네가 잘하면, 숫자(기록)가 그렇다고 말한다. 넌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고, 계략을 부릴 필요도 없다. 넌 경기비평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만약 어떤 마법 공식이 있다면, 그것은 4일마다 등판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야구를 그만 둔 후에도 살아 가야할 많은 시간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내 몸의 모든 부분을 다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


테드 윌리엄스
"남자라면 그 날의 목표, 나아가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한다."
(A man has to have goals - for a day, and for a lifetime)
"야구는 어떤 사람이 10번의 기회 중에서 3번만 성공할 수 있다면, 좋은 활약을 펼쳤다고 인정받는 유일한 땀이 배어있는 야외경기이다."

"모든 감독들은 패배자들이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쉽게 버리는 소모품들이다."
"네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 때엔, 넌 그 일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릴 거다."
"만약 잘 칠 수 있다면 넥타이를 맬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타석으로 가서 미쳐버려라. 너 자신에 대해 미치고, 투수에 대해 미쳐라."


크리스티 매튜슨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You can learn a little from victory; you can learn everything from defeat.)

레지 잭슨
"나의 경우 경기는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조 디마지오
"난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언제나 팬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워렌 스판
"배팅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Hitting is Timing. Pitching is Upsetting Timing.)

로저 클레멘스
"하루 던지고 나흘 쉰다고 해서 그 나흘동안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케빈 브라운
"무념의 상태에서 한순간 공 한 개에 집중한다."

토미 라소다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
(The saddest day of the year is the day baseball season ends.)
"투수는 투구횟수가 아니라 뺏어낸 아웃 숫자로 급료를 받는다."
"내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


윌터 앨스턴
"최선을 다하고 그 나머지는 잊어라."
(Do your best and forget the rest)

행크 아론
"야구에서 안타 3천개를 치는데 17년이 걸렸지만 골프에서는 그것을 하루에 해치웠다."

짐 애보트
"100% 희망이 없어질 때까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장애는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하나의 단순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프로야구
왕정치
現소프트뱅크 감독이자 日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홈런타자.
"나는 괴물이 아니다. 단지 노력하는 인간일 뿐이다."
"야구는 체력이 떨어지면 두뇌로 대신할 수 있다."


나가시마 시게오
日프로아구계의 살아있는 전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대선수가 될 수 없다."

노무라
前한신타이거즈 감독.
"아무리 강타자를 끌어 모아도 팀타율은 3할이 한계이다.
나머지 7할은 범타다. 7할의 범타를 잘 활용해야 3할의 안타가 귀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장훈
통산 3,085안타와 타격왕을 7번 수상한 불세출의 대타자
"타격은 여자의 마음과 같다. 오늘 잘 맞다가 내일은 맞지 않는다."
"진정한 타격왕은 나다. 야자와는 단지 타율 1위일 뿐이다”

*주니치의 야자와라는 선수가 막판에 규정타석을 채우면서 불과 몇모(0.0001)차이로 타이틀을 놓친 장훈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2할 9푼을 치는 타자와 3할 타자의 차이는 단순하다. 2할 9푼 타자는 4타수 2안타에 만족을 하지만, 3할 타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4타수 3안타또는 4타수 4안타를 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선다."

스즈키 이치로
일본을 넘어 메이저리그를 정복한 진정한 야구천재
"난 나와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라인드라이브 안타나 3루수 앞 내야안타나 다 같은 안타일 뿐이다."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 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을 가리켜 천재라고 한다면,나는 해당되지 않는다. 노력한 결과로 무언가 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을 일컬어 천재라고 한다면, 내 경우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노력도 없이 공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2004년 메이저리그 한시즌 최다안타를 수립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에게 들은 '플러스 사고' 라는 말을 지키고 있다."
(플러스 사고란 ? 가난이나 좌절 등의 시련을 맞더라도 '위기는 곧 찬스다'라고 생각하며 반드시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이념으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서부터 생명과 관계된 중대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플러스가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가 된다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스기우라
"우승은 돈으로 살 수 없다."
*1959년 일본시리즈에서 4승을 모두 챙긴 뒤 MVP수상 소감으로...

손정의
現소프트뱅크 구단주
“프로야구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업이다.”


한국프로야구
박찬호
"안된다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사고가 슬럼프를 부른다."
"가장 힘든 일은 꾸준히 해내는 것이다."
"꿈은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다."


김영덕
"비난은 잠시뿐, 기록은 영원하다."

유지현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좋아하는 팬이 남아있을 때 은퇴한다."

박철순
"인생은 많은 시련과 실패를 거듭할수록 성공한다."

이동수
"1200만원짜리 선수든 5억짜리 선수든 경기장안에선 같은 야구선수에 불과하다."

선동렬
"파리에 가면 파리 법을 따라야 한다?"


출처 블로그 > †Believe in miracles!?
원문
http://blog.naver.com/hyukihom/20012199284

2006/03/31 02:34 2006/03/31 02:34

블로거, 해커를 만나다

[ZDNet Korea 2006-01-27 09:08]



태터툴즈는 가장 아름답게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

블로그를 쓰며 수익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노정석이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1996년이나 그 즈음에 유즈넷에서 가끔 그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있다. 그 이후엔 거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가 다시 작년부터 그의 이름을 가끔 듣게 되었다. 그리고 몇 개월 전 태터툴즈라는 블로그 툴(blog tool)의 제작사인 '태터 & 컴퍼니'를 차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블로거들이 사용하는 블로그 툴인 태터 툴즈, 그리고 한 때 가장 유명한 국내 해커 중 한 명이었던 노정석 사장을 만나 보기로 했다.


1월 19일 저녁 강남역

서울 강남역의 저녁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은 한국 벤처 기업의 신화가 시작된 테헤란 벨리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유흥가이기도 하며 또한 수 많은 꿈들이 사라져 버린 곳이기도 하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재빨리 스치고 지나가는 강남역에서 양재 방향으로 200m 쯤 걸어갔다. 저 앞에 노정석 사장이 바깥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 구경 좀 시켜 달라고 했다. 좁고 어수선하다며 굳이 사양하는 걸 억지로 구경을 했다.

한 10평 정도되는 정 사각형의 사무실엔 여섯 명이 노트북을 펴고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기 곤란하다는 건 이해를 할 만 했다. 근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늦은 저녁을 먹은 후 곧장 인터뷰를 시작했다.


뭐하는 사람이에요?



(태터&컴퍼니 노정석 사장)

노정석 사장이나 태터툴즈(tattertools.com)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IT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낯설 수 있다. 그래서 첫 질문은 자기 소개였다. 회사 취업 인터뷰도 아니고 자기 소개를 먼저 해 달라고 하니 노 사장도 좀 난처한 표정이었다. 카이스트 94학번이고 경영공학을 전공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졸업을 2004년에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졸업이 좀 늦었다는 질문을 했더니 "1996년 해킹 사건 때문이었다"는 답변을 했다. 아, 맞다! 그제서야 과거의 사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996년에 언론 지상을 한 동안 장식했던 카이스트-포항공대 해킹 사건의 주역이 바로 노 사장이었던 것이다. 당시 카이스트의 컴퓨팅 동아리였던 쿠스(KUS)의 회장이 바로 노 사장이다.

노정석 : "그 사건으로 인해 졸업이 늦어졌다. 덕분에 유치장 경험도 해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냥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언론에 노출되어 너무 크게 부각되는 바람에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이후에 해킹 사건의 이유나 결과가 잘못 전달된 측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 사건은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지금도 네이버 같은 곳에서 노정석으로 검색하면 그 이야기가 나온다."

해킹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실제로 해킹(hacking)은 테러가 아니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해킹은 컴퓨팅이나 프로그래밍을 광적으로 좋아하여 이런 저런 조작을 가하고 수정하며 분석하는 일련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해커(hacker)라고 부른다. 삼성전자와 같은 유명 대기업에서 하드웨어를 설계하는 사람들도 광의적 의미해서 해커라고 부를 수 있다. The New Hacker's Dictionary의 편집자인 에릭 레이몬드는 해커를 "솜씨 좋은 프로그래머"로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 대부분의 언론은 해커를 '시스템 침입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럼 호적에 붉은 줄이라고 그인 것이냐?"고 물어 봤다.

노정석 :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사건이 벌어진 후 몇 개월 유치장에서 지내야했고 이후 벌금형을 받고 풀려 나왔다."

그 사건 이후의 어떤 일을 했는 지 물어 보았다, 노 사장은 학교를 다닐 때 sendmail 패치나 개발 관련한 일도 했는데, 국내 대부분의 이메일을 지원하는 웹 사이트는 여전히 이 프로그램을 서버에서 사용한다.

노정석 : "1997년도 여름 인젠(inzen)의 창업에 관여했다. 현재 인젠은 코스닥에 등록되어 있다. 이후 여러가지 경험들을 했고 컨설팅 회사에서 2년 간 근무하기도 했다. 잠깐 다녔던 곳이라 적을 둔 곳이라 밝혀도 될 지 모르겠지만 1년 동안 SK텔레콤의 C.I 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SK텔레콤의 C.I 팀? C.I는 커뮤니케이션 인텔리전스 즉 지능형 대화와 관련한 연구를 하는 조직이다. 그리고 SK텔레콤의 최연소 이사로 승진하여 더욱 유명했던 윤송이 이사가 맡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윤송이 이사는 오래 전 모 텔레비전에서 '카이스트'라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이기도 했다,

노정석 : "맞다, 그 윤송이 이사가 운영하는 팀에서 근무했다. 윤송이 이사는 카이스트 1년 선배이기도 하다. C.I 팀에서 1년 간 근무하며 개인화 플랫폼에 대한 연구를 했다. SK텔레콤의 1미리 서비스와 같은 것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을 그 팀에서 개발했다. 매우 흥미로운 나날이었고 프로젝트들도 재미있었다. 내게 큰 도움이 된 시간들이었다."

한쪽은 각종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하여 MIT로, 맥킨지로, 와이더댄닷컴으로 다시 SK텔레콤의 이사로 움직인 반면 한 쪽은 몰입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해커, 참 다른 삶의 행보다. 그래도 함께 일하며 즐거웠다니 신기한 일이다. 최근 창업한 회사인 '태터&컴퍼니' 이야기로 넘어가 보기로 했다.


왜 회사를 만들었나?

돈 벌려고 만들었지. 사장들에게 이 따위 질문을 하는 건 멍청한 일이다. 그러나 노 사장은 다르게 답할 것 같았다. 역시나 다르게 대답했다,

노정석 :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블로거들에게 수익모델을 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가능성을 실현하고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현재 '태터툴즈'는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자기 홈페이지에서 포탈에서 제공하는 블로그와 다를 바 없는 블로그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태터툴즈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노 사장이 아니라 정재훈이라는 사람이다.

노정석 : "태터툴즈를 만든 정재훈 씨를 작년 초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태터툴즈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전했다. 이후 미사리에서 고구마 구워 먹으며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정재훈 씨와 내가 바라보는 블로그에 대한 생각이 맞는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함께 하자고 제안을 했다. 회사는 작년 하반기에 만들었다."

하지만 현재 태터&컴퍼니에는 정재훈 씨가 없다. 정재훈 씨는 네이트닷컴의 일본 자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노 사장은 정재훈 씨가 보다 많은 경험을 하길 원했다고 한다. 그와 당장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과 많은 경험을 통해 더욱 신뢰있는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고 한다. 이번 인터뷰 때문에 사람들이 태터툴즈의 개발자를 노 사장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고 했더니,

노정석 : "태터툴즈는 어떤 한 사람이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터&컴퍼니가 만들고 있다. 그러나 정재훈 씨가 처음에 만들었고 이후에 유지를 한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걸 잊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대가를 정재훈 씨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터툴즈는 이제 우리가 함께 만들고 있다."


태터툴즈가 뭐냐?

태터툴즈, 영어라서 어렵기도 하지만 발음하기도 어렵고 낯설다. 한국의 블로그 인구가 몇 백만 명이라고 하지만 이들 중 태터툴즈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설명을 부탁했다. 도대체 태터툴즈는 뭐고, 일반인들에게 뭐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될까?



노정석 : "태터툴즈라는 이름이 어렵다는 소리는 가끔 들었다. 태터(tatter)라는 단어는 옷을 깁다는 의미로 선정한 이름이다. 근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태터링(tattering)'이라는 단어를 쓰곤 하는데 이게 꽤 재미있는 의미가 있다. 원래 있던 이론을 철저히 까 밝히고 논파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태터툴즈라고 소개를 하면 꽤나 재밌는 단어라고 반응을 한다."

현재까지 태터툴즈를 설치한 사람이나 다운로드 횟수 등을 물어 봤다,

노정석 : "다운로드는 여러 곳에서 이뤄지니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2004년에 태터툴즈가 공개된 후 우리 사이트에서 약 30만 회 정도가 다운로드 되었다. 설치를 하고 태터센터라는 곳으로 글을 보낸 것은 약 15만 회 정도가 된다. 하루에 태터센터로 도착하는 글은 약 1,500개 ~ 2,000개 수준이다."

노 사장은 좀 보수적으로 숫자를 이야기한 것 같다. 태터툴즈를 자신의 계정에 설치를 할 때 별도로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http://tracezone.com/tt" 이런 식으로 '/tt'라는 디렉토리에 블로그가 설치된다. 구글에서 '/tt'로 검색하면 약 1,580,000개의 한글 검색 결과가 나타난다. 실제로 테터툴즈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노 사장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 확산은 한나라당 대변인인 전여옥 씨의 블로그조차 태터툴즈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되리라 본다. 태터툴즈는 삼성전자에 블로그 툴로 공급되고 있기도 하다.



(태터툴즈로 블로그를 쓰는 전여옥 대변인 블로그)

그런데 태터툴즈는 개인 사용자든 기업 사용자든 무상으로 다운로드를 해서 설치해도 관계가 없다. 실제로 검색 전문 회사인 첫눈(blog.1nooncorp.com)도 기업 블로그를 태터툴즈로 쓰고 있으며 중소 업체의 경우 부지기수로 태터툴즈를 기업 블로그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개인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도대체 돈을 벌 생각은 있는 걸까? 또 한 번 무식한 질문을 해 봤다.

태터툴즈로 돈을 벌 생각은 없는 건가?



노정석 : "그렇다. 태터툴즈로 돈을 벌 생각은 없다."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럼 뭔가 복안이 있을 것 같은데?

노정석 : "태터툴즈는 공공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최초에 이 프로그램을 만든 정재훈 씨도 그런 생각이었다. 좀 쉽게 블로그를 설치하고 편하고 예쁘게 블로그를 꾸미고 싶은데 그런 도구가 없는 거다. 그래서 만들었다고 했다. 나도 이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니 태터툴즈는 블로그를 쉽고 편하고 예쁘게 가꾸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태터툴즈가 해야 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만족이다."

뭔가 꿈꾸는 사람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노정석 : "태터툴즈가 보다 쉽고 편리하고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블로그 도구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말 좋은 콘텐트가 마구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 콘텐트를 원하는 기업도 많아질 것이다. 블로거들은 자신의 글이나 콘텐트를 팔 수도 있다. 단지 블로그를 즐기는 것으로도 수익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도구로써 태터툴즈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롱테일(long tail)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노 사장은 생태계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인터넷을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로 보고 태터툴즈가 그 생태계를 풍부하게 만드는 구조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럼 태터툴즈를 최고의 블로그 도구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일까?

노정석 : "그렇지 않다. 태터툴즈말고 또 다른 계획이 있다. 이올린(eolin)이라는 플랫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것은 블로그 콘텐트의 신디케이션과 가치를 중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일종의 P2P 웹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위젯 형태로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도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올린은 지능화된 개인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고 현재 포탈 등에서 제공하는 개인화 페이지는 아니다. 진정한 개인화는 모든 접근 권한을 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올린은 그런 권한을 개인들에게 줄 것이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올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기술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비전도 있었고 가능성에 대한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은 단지 블로그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는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 부분은 노 사장도 공감했다.

노정석 : "우리 회사가 만드는 것들은 결국 회사의 슬로건인 'Brand yourself!'로 사용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자신을 브랜딩하세요! 자신의 생활과 마음과 생각을 가장 쉽고 편하고 또한 아름답게 표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한 가지 가치를 덧붙일 것이다. 블로그를 쓰며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가치체인(value chain)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태터툴즈의 슬로건, Brand Yourself!)


사람에 대하여

노 사장은 카이스트 출신이다.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을 나왔다. 이것이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될까? 실제로 국내 IT 업계에서 카이스트 출신의 힘은 굉장하다. 개발, 기획, 경영에서 이미 성공한 사람들도 있고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 또한 카이스트 출신인 노 사장에게 이런 것에 대한 입장을 물어 보았다,

노정석 : "카이스트 출신 중에 이미 사업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아 뭔가 부탁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게 많은 건 사실이다. 이런 인맥을 활용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카이스트 출신들의 기술적 역량이 높은 것도 맞다고 본다. 그러나 사업의 성공은 기술보다는 어떤 사업 모델을 추구하며 고객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했는 가가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는 카이스트 출신이 유리하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지 않나."

요즘 이쪽 업계는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취업난이라고 하지만 업체 입장에서는 정말 필요한 인력을 뽑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노정석 : "회사 직원을 뽑을 때 블로그를 통해 뽑았다. 수 백개의 블로그를 검색하고 방문하여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알아 보았다. 직접 연락을 해서 만난 경우도 많았고, 그렇게 만난 분들이 지금 회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이 카이스트 출신이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매우 만족한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열정적으로 살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것을 믿고 뽑았을 때 그 믿음은 맞았다."

기업 경영자 입장에서 블로그를 인력 채용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물어 봤다,

노정석 : "기업 입장에서 블로그는 "숨은 다이아몬드를 발굴"하는 측면에서 활용 가능하다고 본다. 채용의 첫 절차를 블로그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중간 과정 이상에서 블로그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취업을 위해 블로그를 만들어서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정성이 들어간 블로그와 급조된 블로그는 구분할 수 있다."


약간 기술적인 이야기



(태터툴즈 홈페이지, www.tattertools.com)


태터툴즈와 블로그에 대한 기술적인 질문을 몇 가지 했다,

블루문 : "태터툴즈를 웹 호스팅 업체를 통해 제공하면 수익 모델이 생길 듯 하다"

노정석 : "그런 건 고민을 했었고 실제 진행이 되고 있다. 누군가 태터툴즈를 다운로드하려고 할 때 추천 호스팅 업체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수익을 분배할 수 있으리라 본다."

블루문 : "태터툴즈가 다른 외국계 블로그 도구보다 우월한 점은 무엇인가?"

노정석 : "우수한 외국계 블로그 설치 도구가 있다. 태터툴즈는 그들보다 사용과 제어가 쉽고 스킨 등의 변경이 매우 쉽다. 때문에 자신만의 독특한 블로그 스타일을 만들기 쉽다. 이것은 사용자 입장에서 태터툴즈를 선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블루문 : "네이버처럼 블로그 스킨(skin)을 판매하여 수익을 구할 수 있지 않나?"

노정석 : "사용자들이 직접 제작한 스킨을 서로 사고 팔 수 있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앞서 이야기한 '이올린'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블루문 : "개인이나 기업에 대한 태터툴즈의 라이센스 정책은 무엇인가?"

노정석 : "특별히 제한하지 않는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누구든 자유롭게 다운로드하여 사용해도 좋다. 다만 태터툴즈 자체를 수정해서 상업적으로 재판매하는 것은 불가하다."

블루문 : "포탈 블로그 사용자들이 태터툴즈로 이사하는 걸 지원할 계획은 있나?"

노정석 : "일부 태터툴즈 사용자들이 그런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걸로 안다. 그러나 태터툴즈가 직접 그런 지원을 하지는 않는다. 사용자들이 필요하다면 스스로 제작하여 배포할 것이다."

블루문 : "블로그 도구를 개발하려는 개발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노정석 : "만약 회사에서 아파치 웹 서버를 쓰는데 뭔가 특이한 상황을 해결해야 할 경우 그렇다고 새로운 웹 서버를 개발하지 않는다.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새로운 블로그 툴을 만들려고 고민할 필요없이 태터툴즈를 쓰라고 권하고 싶다. 이미 개발된 태터툴즈를 수정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블루문 : "태터툴즈를 써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가?"

노정석 : "완벽히 독립적이며 차별성 있는 당신만의 블로그를 갖고 싶다면 태터를 선택하세요."


벤처의 숙명을 생각하며

2시간이 훌쩍 넘는 인터뷰를 끝내며 노 사장은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1월 말에 나올 태터툴즈 1.0 정식 버전의 마무리 작업 때문에 전 직원이 매일 12시가 넘을 때까지 일을 한다고 한다. 강남역으로 가는 길을 걸으며 차들이 밀려 있는 강남대로를 바라본다. 저기엔 커뮤니티 벤처가 있었고, 저기엔 보안 솔루션 벤처가 있었고, 저기엔 쇼핑몰 벤처가 있었고... 현란하게 반짝이는 광고판 사이로 드문 드문 불이 켜진 건물들을 보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벤처들을 추억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국이 성장할 수 있는 힘은 꿈과 이상을 현실의 땅에 꽂아대며 무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벤처들에게 있다. 힘 내라!


:: 태터툴즈 노정석 사장과 정재훈 씨의 블로그에서 직접 대화할 수 있다

노정석 씨 블로그 http://www.moreover.co.kr/

정재훈 씨 블로그 http://interlude.pe.kr/


** '블루문'은 인터뷰어의 필명이다. 웹 컨설턴트이자 IT 뉴스 전문 블로거이며 ZDNet에서 전문 블로그와 칼럼을 제공하고 있다. blog.naver.com/kickthebaby 에서 '가장 거대한 아스피린'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블루문 (아하!블로그 aspirin.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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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31 02:51 2006/01/31 02:51

Ally McBeal

2005/10/09 08:15 / Other Scraps/Articles

Ally McBeal, Calista Flockhart


참 희한하게 생겼다. 그래도 왠지 모를 매력이 풀풀.
하는 짓은 그야 말로 앙증, 깜찍, 귀염덩어리!
드라마에서는 참 이쁘게 나오는데, 사진들은 왜 그리 다들 이상한지!
2005/10/09 08:15 2005/10/09 08:15

목표가 크면 클수록 장애도 크다
장애가 크면 클수록 달성도 크다
그러므로 실패는 장애 탓이 아니라
해이해진 노력의 결여 탓이다

- 라비 바트라



목표에 더 쉽게 '도달하기 위해'
목표를 낮추지는 마라
설령 그 목표에 쉽게 도달한다 해도
그 목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



항상 기억하라.
당신이 변해야 하기 이전에 변한다면
경쟁자가 당신을 따라잡을 무렵
이미 당신은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 ???



겁에 질린 사람에게
가장 큰 용기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도 두려워 한다는 사실이다

- 움베르토 에코



우리는 정의로운 근거 위에서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또한 정의로운 순간에
정의로운 태도로
그리고 정의로운 시대를 위하여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을 찬양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한 사람에게서 조언을 구할 때마다
그만큼 우리의 적은 적어지는 법이다

- 칼릴 지브란



말하기의 반대는 듣기가 아니다
말하기의 반대는 기다림이다

- ???



우리에게 아무 책임이 없는 상황이라도
일단 응답을 하면 그것 때문에 책임을 지게 된다

- 알란 마시에



느닷없이 오는 공포란 없다
오직 공포를 예상할 때만
공포는 찾아오는 것이다

- 알프레드 히치콕



사람들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에 반응을 보인다
물론 주일학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다

- ???



눈 내린 들판을 밟아 갈 때는
모름지기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욱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 서산대사



사람은 생활이며
학문이 아니라 행동이며
그리고 전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간성인 것이다

- 사무엘 스마일즈

“Religion is an insult to human dignity. With or without it, you'd have good people doing good things and evil people doing bad things, but for good people to do bad things, it takes religion.” - Steven Weinberg
2005/10/03 00:54 2005/10/03 00:54

서울지역 라디오 주파수 목록



KBS제1라디오: AM 711 KHz, FM 97.3 MHz, 단파 3930 KHz
KBS제2라디오: AM 603 KHz, FM 106.I MHz
KBS제3라디오: AM 639 KHz
KBS제1FM: FM 93.1 MHz
KBS제2FM: FM 89.1 MHz
KBS사회교육방송: AM 972, 1134 KHz, 단파 6.015 MHz
국악방송: FM 99.1 MHz
경기방송(수원지방): 99.9 MHz
MBC: AM 900 KHz, 음악FM(4U) 91.9 MHz, 표준FM 95.9 MHz
SBS: AM 792 KHz, 파워(음악)FM 107.7 MHz, 러브(표준)FM: 103.5 MHz
CBS: AM 837 KHz, 음악FM 93.9 MHz, 표준FM 98.1 MHz
TBS: FM 95.1 MHz
EBS: FM 104.5 MHz
BBS: FM 101.9 MHz
AFKN: FM 102.7 MHz
PBS: FM 105.3 MHz
극동방송: AM 1188 KHz, FM 106.9 MHz
2005/09/27 21:57 2005/09/27 21:57

자경문(自警文)


율곡선생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외가인 오죽헌으로 돌아와, 앞으로 걸어나갈 인생의 이정표를 정립하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워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지어 좌우명을 삼았다.

이것은 율곡의 일생에서 커다란 삶의 전환을 의미하며, 그의 사상은 그 이후에 다방면으로 전개되며 더욱 깊고 정밀해졌으나 가장 골자가 되는 기초는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

이 자경문은 11조항으로 되어있다.

1. 입지(立志)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2.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 때가 된 뒤에 말을 한다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3. 정심(定心)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일은, 그런 힘을 얻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정력(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힘)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잡념이 분잡하게 일어날 때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해서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분잡해지는 것과 같다. 금방 일어났다가 금방 없어졌다가 하여 나로 말미암지 않는 것같은 것이 마음이다. 가령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질러 있으니, 이것 또한 망녕된 잡념이다.

분잡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정신을 수렴하여 집착없이 그것을 살필 일이지 그 생각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해나가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안정되는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일을 할 때에 전일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또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이다.

4. 근독(謹獨)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들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5.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그냥 가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오똑히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된다.

6.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7. 진성(盡誠)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에, 만약 해야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일체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8. 정의지심(正義之心)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9. 감화(感化)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해야 한다.

한 집안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10. 수면(睡眠)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 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두루 걸어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11.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늦추지도 않고 서둘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해나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自警文

자경문

1.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호불급성인 칙오사미료

2.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심정자언과 정심자과언시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시연후언 칙언불득불간

3.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

구방지심 일조수지 득력기가용이 심시활물 정력미성 칙요동난안 약사려분요시 작의염오

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胸中 此亦妄念也 當於紛擾時

욕절지 칙유각분요 숙기홀멸 사불유아 가사단절 지차단절지염 횡재흉중 차역망념야 당어분요시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수렴정신 경경조관 물여지구왕 용공지구 필유응정지시집사전일 차역정심공부

4.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상이계구근독의사 존제흉중 염념불태 칙일절사념 자연불기

萬惡 皆從不謹獨生

만악 개종불근독생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근독연후 가지욕기영귀지의미

5.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효기 사조지소위지사 식후 사주지소위지사 취침시 사명일소위지사 무사칙방하 유사즉필사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득처치합의지도 연후독서 독서자 구변시비 시지행사야 약불성사 올연독서 칙위무용지학

6.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리영리 수득소제기념 약처사시 유일호택편의지념 칙차역이심야 우가성찰

7.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범우사지 약가위지사 칙진성위지 불가유염권지심 불가위지사 칙일절절단 불가사시비교전어흉중

8.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상이행일불의 살일불고 득천하불가위저의사 존제흉중

9.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횡역지래 자반이심성 이감화위기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일가지인불화 지시성의미진

10.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

  비야면급질병 칙불가언와 불가파의 수중야 무수사 칙불와 단불가구박 주유수사 당환성

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차심 십분맹성 안피약중 기이주보 사지성성

11.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 약구속기효 칙차역이심 약불여차 육욕유체 변비인자


2005/05/22 17:22 2005/05/22 17:22

君不見

2005/04/15 18:47 / Other Scraps/Articles
君不見(군불견) 杜甫 作(두보 씀)

丈夫蓋棺事始定  장부는 관을 덮어야 일이 비로소 결정되는데,
君今辛未成老翁  그대는 아직 다행히 늙지 않았네.
何恨樵悴在山中  어찌하여 초췌하게 산 속에서 한탄만 하는가,
深山窮谷不可處  심산 궁곡은 살 곳이 못되는데.
2005/04/15 18:47 2005/04/15 18:47

1회: 뒤돌아보는 자화상
2회: 단 한번밖에 못 산다
3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4회: 속물과 귀족의 구별은 있다
5회: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6회: 알 것은 많고 배울 것은 무한하다
7회: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8회: 그래도 할 일은 한없이 많다

1회: 되돌아보는 자화상

거울 속에 보이는 백발의 내 모습이 믿어지지 않는다. 저런 흰머리가 정말 내 머리이며, 주름진 얼굴이 정말 내 얼굴인가.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의 꿈속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현실과 꿈이 헷갈린다. 어쨌든 내 머리카락이 백발이 됐으니 긴 세월이 지나갔다는 것과 내가 오래 살아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고, 고희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참 오래 살아 남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 남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는 해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순간에 죽음이 벼락같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삶에 있어서 삶의 하루하루, 한 순간 한순간은 하나같이 다 아슬아슬한 기적이다.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뒤돌아 반성해 보는 일이 더 나은 생각, 더 정확한 말, 더 적절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만이라도 중요하다면, 자신의 지난 삶을 전체적으로 뒤돌아 반성해보는 일은 앞으로 더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중요하다. 이 같은 반성은 그때그때 언제나 필요하지만, 머지않아 마무리하게 될 삶을 의식하게 될 즈음에는 더욱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부여하는 차원에서 한층 더 의미 있다. 약 반세기의 교편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마당에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정체와 의미를 반성하게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에 태어나, 칠 년 동안 일제 교육을 받았고, 해방의 흥분과 혼란기, 한국전쟁, 5.16 쿠데타, 군사독재, 한국의 산업화, 근대화, 그리고 마침내 민주화라는 숨가쁜 격동기를 지냈고, 시간적으로는 20세기의 10분의 7을 살았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 왔나. 나는 어떤 존재인가. 지금 거울 속에 보이는 대로 나는 백발의 한 남자이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검은 머리카락이 좀 남아 있었고, 20년 전만 해도 검은머리가 꽤 많았으며, 30년 전에는 흰머리가 전혀 없었다.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머리 색깔만이 아니라 신장, 체중, 또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성격적으로 부단히 달라져 왔다. 그러니 그 동안 줄곧 사용되어 왔던 '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할 수 없다. 불변하는 실 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나'라는 것은 그냥 말뿐이다. '나'라는 말을 둘러싼 생물학적 존재의 변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나'라는 고정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밖과 안으로부터 일어난 변화의 산물이다. 아니 변화 그 자체일 뿐이다.

나는 어떻게 변해 왔는가.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려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칠순이라는 연륜의 거울 속에 비치는 백발의 내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나의 기억 속에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수많은 나의 과거의 모습들이 산만하면서도 희미하고 드문드문 끊어진 상태로나마 오래된 필름처럼 펼쳐진다.

푸짐한 어머님의 젖을 빨며 무한한 충족감을 느꼈던 어릴 적 기억이 오로지 느낌으로만 되살아난다. 네 살 나던 겨울 급성폐렴에 걸려 일꾼의 등에 업혀 몇 십리 되는 온양온천까지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 어떤 기계 앞에서 가끔 먹던 약 냄새가 아직도 역력히 기억에 살아 남아 있다. 사랑방에서 항상 탕건을 쓰시고 긴 담뱃대를 물고 계시던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뜻도 모르는 천자문을 억지로 배우던 기억도 떠오른다. 나는 새 양말, 속 옷, 색도 바지저고리를 갈아입을 수 있는 설날을 기다리곤 했다. 제사날 밤이면 사당에서 이웃 동네에서 오신 작은 댁 식구와 함께 지내던 새벽 제사의식에 참석하고자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제사가 끝난 후에 잠을 깨고 골을 내곤 하면서도 제사 밥을 맛있게 먹던 일도 기억에 남아 있다.

20리 밖에 있는 읍내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 앞에 걸터앉아 실려가면서 뒤따르는 동네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날이 머리에 떠오른다. 멀리 있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늦은 봄이면 야산을 누비며 새둥지를 뒤졌고, 여름이면 개천에 발가벗고 덤벅 뛰어 들어 물장난을 즐기던가 논두렁이나 연못에서 고기잡이에 열중하곤 했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논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손이 얼어붙어도 추운 줄 몰랐다. 눈이 쌓이는 날이면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오는 알록달록한 방울새를 산채로 잡으려고 마당 앞에 '탑새기'를 뉘어놓고 나한테 속은 새들이 그 '탑새기'에 채이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다. 시간이 흐르는 줄 몰랐고,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재미났다. 여름이면 모기에 물리고, 겨울이면 달달 떨어야할 때가 많았지만 그 때도 나는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형들의 뒤를 따라 어느덧 서울로 '유학'을 간다. 남보다 일찍 사춘기가 닥쳐 왔다.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세상과 인생이 이상스럽게만 보인다. 어른들의 세계는 물론 중고등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폭력을 목격한다. 불공평한 사회, 사람마다 짊어져야 할 운명을 의식한다. 사회의 부조리, 성인들의 부조리, 세계와 운명의 무게, 사람들의 무지에 짓눌림, 아픔, 분노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무력감, 격동적 사춘기와 맞물린 실존적 고뇌에 빠진다.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큰 고민을 혼자 짊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덧 염세주의자, 아니 허무주의자로 변해간다. 생판 처음으로 교회에도 나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는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문학에 눈이 떴고 시인, 사상가, 문필가가 되고자 하는 막연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나는 책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 돌아와 가난, 막막하기만 앞날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들뜬 상태에서 나는 시를 쓰고 문학을 논한답시고 다방에 드나들면서 담배만 피워대거나 판잣집 음식점에 앉아 학생증을 맡기고 같은 또래의 문학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동숭동 대학 골목과 명동거리를 건들거리고 다녔다. 나는 살고 싶었다. 멋있고 뜨겁게 보람있게 살고 싶었다. 감상적일 만큼 로맨틱한 나는 소설에서 읽거나 영화에서 본대로 멋있고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젊음을 아름답게 살고 싶었다. 이런 욕망을 갖지 않은 젊은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 덧 4년간의 대학생활이 후딱 날라 갔다. 나는 더 이상 그냥 학생이 아니다. 나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어둡고 답답한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 했다. 시간은 가혹하다. 한번 지나간 과거는 결코 회복할 수 없고, 한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또한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하나의 선택을 했다. 옳고 보람있는 삶을 살자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보람있는 것인가를 알아야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것도 철저히 투명하게 알고 싶었다. 모든 것에 투명하고 싶었다. 그러니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나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이 무렵 어느 날 오후 종로 3가에 있는 단성사 앞을 지나갈 때 눈에 언뜻 띠었던 'No Time To Love'라는 미국영화 간판을 보고, '그렇다, 저 말이 지금 내가 꼭 하고싶은 말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바쁜 걸음으로 사람들의 틈을 비키면서 앎의 길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남달리 일찍 찾아온 사춘기를 맞아 12살부터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때 나는 이미 배움의 길을 위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기로 혼자 결심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길은 이화여대의 불문학과에 통하게 됐고, 그것은 어느 덧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이어지고, 5년 동안 그 주변을 정신없이 배회했다. 그 길은 다시 대서양을 날라 북미대륙을 지나 도착한 남가주 대학으로 연장됐다. 거기서 2년 반 뒤 학생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과대학인 뉴욕주 소재 RPI에서 뜻하지 않게 철학교수로서 길을 시작한다. 2년 후 보스턴의 시몬스 여자대학으로 옮겨 23년을 재직하다가 한 학기 후면 포항공대에서의 8년 반을 끝으로 1952년에 시작한 교편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지금 내가 후학들에게 인생과 학문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2회: 단 한번밖에 못 산다

누구나 단 한번밖에 못 산다. 나는 지구상에 한번 태어나서 지구상에서 한번 살다가 지구상에서 한번 죽는다. 인생은 지구상에서만 존재하고 단 한번뿐이다. 죽으면 흙으로, 분자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렇게도 집착해 왔던 나/자아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 고정된 영원한 '나/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과정일 뿐이고 인생은 우주의 찰나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영생,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나의 삶과 미래의 나의 삶, 천당과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다운 자아와 참다운 영생은 '나/자아'라는 존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자연에 흡수되어 자연의 일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 자체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개나 돼지, 나무나 풀, 흙이나 먼지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하나의 갈대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그냥 돼지나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돼지이며 생각하는 갈대이다.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은 자연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혜, 결단, 의지에 따라 바꾸어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인지적, 의지적 능력도 자연의 우연한 일부 산물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한 능력으로 자연과 자기 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그냥 자연과는 다른 이상한 자연, 자연 아닌 자연이다.

인간이 그저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라는 사실은 이성의 거울에 비추어 알 수 있고, 인간이 동물, 식물, 세포, 물질과 다름없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은 과학이 보여주는 진리이다. 이성과 과학이 모든 대답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과학이 그려 보이는 세계보다 더 믿을만한 것은 아직 없다. 이성과 과학은 진리의 원천이다. 믿든 말든 사실은 사실이고 싫든 좋든 진리는 진리이다.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리를 진리로서 인정하는 혜안이 필요하고, 이러한 혜안을 갖으려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직성,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의 인식이야말로 참다운 나의 발견의 유일한 바탕이며 뜻 있는 삶의 원초적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영겁과 구별할 수 없는 우주의 시간에 비추어 보면 인류의 역사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득한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나의 삶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 그러한 순간도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반복될 수 없다. 삶은 살과 뼈, 피와 의식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개체로서만 존재하고, 개체로서의 삶은 일회적이다. 이런 점에서 세포에서 시작하여 벌레나 날짐승이나 원숭이나 인간의 삶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유일한 하나의 개체로 태어나 개체로서 살다가 개체로서 죽어 자연 그리고 우주로 회귀하여 영원한 순환의 궤적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 아무도 자신의 삶을 반복할 수 없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모든 생명은 단 한번만 산다. 영생이란 바로 이렇게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화하는 과정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면 나는 이미 살아 존재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나는 이유 없이 태어난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싫든 좋은, 이유가 있든 말든 나는 이유도 모르는 채 살아야 한다.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연히 어떤 특정한 때,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부모에 의하여 태어났다. 어느덧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지내고 어쩌다 보니 어느덧 중년 그리고 백발 노인이 되어 내 자신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한다. 생각해보면 볼수록 한 인간의 삶, 한 생명, 모든 존재는 아무런 궁극적, 초월적 의미가 없다. 사실 '궁극적 의미'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의미가 나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와 현상은 아무 궁극적 뜻 없이 그냥 있고, 그냥 변하고, 그냥 돌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내세와 천당의 부재, 아니 영원불변의 '나/자아'의 부재, 현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이고 이 지구에서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한탄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세와 천당이 없기에 현재의 삶은 더 절실하고, 단 한번밖에 살 수 없기에 현재의 이 삶이 한결 더 귀중하다. 보람 있는 삶을 사느냐 아니냐의 판가름은 오로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찰나같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 해, 하루, 한 시간, 한 찰나는 그 하나 하나가 더 절실할 수 있다. 단 한번만의 인생이 찰나같이 짧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심히 지내는 하루하루, 한 순간 한 순간은 무한히 귀중하고 낭비하기에는 잠시라도 너무나도 아깝다.

형이상학적, 초월적 인생의 목적이 없다고 해서 절망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만약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어 한없이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 부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인생의 목적과 의미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그 활동, 노력 자체에 있다. 인생의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서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 인간이 스스로 내부에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 존재의 우연성은 내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내 존재의 무의미성은 내 존재의 의미의 원천이다. 처음부터 나의 모든 삶의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었다면 나는, 나의 존재는 하나의 무의미한 기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원래부터 내 인생의 의미가 정해졌다면 나의 삶은 그냥 존재할 뿐 내가 사는 나의 삶으로서는 무의미하다. 인류가 한 종의 갈대로서 다른 종들의 갈대와 꼭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고 그 자체로서 무의미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류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갈대와는 다른 자연의 일부이고, 바로 이런 점에서 인류에게만 존재의 '의미'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각자가 만들어낸 인생의 의미는 다름아니라 그가 살아 온 삶의 구체적 과정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정해지고 주어진 방법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혜지, 선택, 결단, 의지에 달려있다. 인생의 의미가 단지 각 개인이 선택한 삶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인생의 의미와 마찬가지이며, 그렇다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되는 대로, 기분대로 살아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구체적으로 그 기준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항상 나올 수 있지만 성자같이 보낸 인생이 있고 개처럼 지내는 인간의 삶이 있으며, 예술작품 같은 인생이 있는가 하면 걸레조각 같은 인생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단 한번밖에 못살고, 단 한번밖에 선택할 수 없다면 나의 삶의 의미는 내가 현재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원히 결정된다. 인생에는 재수가 불가능하다. 한번 망친 인생은 영원히 망친 인생이다. 삶에 대한 태도의 결정, 삶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의 선택문제 앞에서 한없이 숙연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반적 기준은 없을까. '인간으로서 가장 떳떳할 수 있는 삶' 이외에 더 기본적이고 중요한 잣대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떳떳할 수 있는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권력인가. 부의 축적인가. 명성인가. 꼭 그렇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나쁠 게 전혀 없다. 그러나 권력자 가운데는 범죄자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고, 거부들 가운데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 허다하며, 명성을 누리는 이들의 뒤에는 감추고 싶은 그늘과 때가 많다. 쾌락인가. 쾌락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공허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직업이 '인간다운 삶'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다움에는 직업의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직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태도이다. 자신의 신조에 따라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철저하게 정직하고, 불꽃같이 타듯이 뜨거운 열정으로 살고자 하는 태도이다. 똑바로 눈을 뜨고 소신대로 살자. 자신을 속이지 말라.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고 끝까지 꼿꼿하자.

3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돌은 그냥 있고 물은 그냥 흐르며, 풀과 나무는 그냥 솟아나고 자라다가 시들고 말라죽으며, 버러지나 짐승은 그냥 나르고 뛰며, 그냥 먹고 싸고 번식하다 죽는다. 어떤 돌 조각, 물방울, 풀, 나무, 버러지, 짐승도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갖고 "나는 무엇이냐"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 그 시기와 심각성의 밀도는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아에 대한 의식을 하게 된다. 외부 세상만을 보던 시선이 문득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되어, 엄마와 과자, 새와 토끼, 장난감과 책, 여자와 돈을 찾고 가려내던 생물학적 '내'가 갑자기 자신의 '나'를 찾게 되며, "나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희미하게나마 묻게 된다. 이런 물음으로 자연적 존재로서의 나의 삶에 금이 가고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긴다. 이런 상처내기는 동물학적 내가 인간학적 나로 변신하여 새로이 탄생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다.

'나'라는 일정한 즉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객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십여 년 동안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끊임없이 줄곧 변화해 왔는데도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복돌이'로 불러 왔다. 나/복돌이는 누구냐? 복돌이는 한국인이며, 어디 어디에 사는 아무개의 아들이며, 포항공대 일학년생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다. '한국인', '아무개의 아들', '포항공대 학생'은 복돌이의 우연적으로 결정된 자연적, 제도적 속성이지 복돌이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돌이'로 불리는 나는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개체임에 틀림없다. 나는 아버지, 똘똘이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 아무도 내 대신 먹고, 자고, 배설하고, 고민하고 살고 죽을 수 없다. 만일 다른 인간이 나를 대신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나를 대신하는 것이지 결코 나 자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복돌이는 도대체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우선 살과 뼈, 피 등 물질의 특정한 집합으로 규정될 수 있고, 이러한 물질적 집합이, 세포나 더 나아가서 특정한 유전자로 분석될 수 있다면, 그 유전자는 다시 분자, 전자, 쿼크 등 한없이 미세한 물리적 입자로 서술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물질과 근본적 차이가 없고 따라서 구별되지 않는다. 내가 이처럼 물질로 환원된다면 나의 유일성은 전혀 허상이다. 이처럼 가시적 즉 현상적 '나/복돌이'의 탐구가 불가능하다면 '나/복돌이'의 본질은 비가시적 즉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유명한 인간정의는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가시적이며 가변적인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현상이 아니라 비가시적이며 비가변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라는 신념을 전제하고, 이 신념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극히 서양적인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그러나 진화론, 정신분석학, 특히 오늘날의 첨단과학에서 볼 수 있듯이 실증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정신 특히 이성의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는 최근 해체주의, 더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에 훨씬 앞서 동양의 불교나 도교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적 차원에서도 이원론적 형이상학은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과학이나 철학은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분간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 보를 양보해서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인정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정신'이라는 특수한 속성으로 규정하더라도, 정신적 존재로서의 나/복돌이의 유일성을 규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이 문제를 풀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복돌이라는 말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 낱말이 유통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음을 입증한다. 나/복돌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복돌이는 앞서 보았듯이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물리학적 차원에서 실증적으로 지각되거나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사념적으로 직관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대상은 아니다. 그런 대상으로서의 나/복돌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복돌이는 형이상학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영원히 고정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각기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나/복돌이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내면적으로 반성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유동적인 주관적 경험 자체이다. 나/복돌이의 경험은 시간을 거치면서 항상 변하면서 새롭게 축적되는 만큼, 나의 경험의 내용은 수시로 변하는 그때 그때의 경험의 총체이다.

경험의 총체로서의 나/복돌이는 세 가지 사실을 함의한다. 첫째, 나/복돌이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나/복돌이를 둘러싼 구체적인 물리적, 사회적, 이념적 및 실천적 관계로서만 규정될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맥락을 떠난 경험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복돌이는 곧 나/복돌이가 한 지각적, 심리적, 행위적 및 생산적 경험의 총체이다. 둘째, 모든 나/복돌이들이 각기 갖게되는 유일성이다. 모든 경험은 특정한 시간, 공간 그리고 구체적인 현상을 떠난 경험은 상상할 수 없는데, 모든 시간, 공간 그리고 구체적인 현상은 항상 변화하며 절대로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궁극적으로 모든 나/복돌이들이 각각 자유스런 존재라는 사실이다. 경험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물리적 반응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대한 해석이며, 해석은 인과적 현상이 아니라 주관적 관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총체'로 규정할 있는 나/복돌이는 처음부터 존재하거나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나/복돌이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다. 나/복돌이는 밖으로부터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복돌이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인간의 본질이 자유라면 유일한 개개인의 본질 즉 정체성은 그가 실천한 자유의 독특한 내용, 양식, 결과 즉 그의 구체적인 삶이다.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나/복돌이의 자유이며, 그에 따라 살아온 구체적 삶의 총칭이다. 자유는 선택을 함의한다. 그렇다면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나/복돌이가 선택한 가치, 태도, 행동, 활동의 총칭이다. 한 인간만이 자유롭고, 정체성은 인간에만 해당된다. 자유가 인간의 증거라면, 정체성은 개인으로서의 각기 나/복돌이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근거이고, 각기 나/복돌이의 정체성은 곧 그가 선택한 삶이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아무도 선택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은 책임을 동반하는 만큼 언제나 불안과 고민을 동반한다. 불안과 고민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치러야 할 통과의식이며 대가이다. 고민할 때만 비로소 나는 그냥 동물로서의 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나를 의식할 수 있고 이러한 확인을 할 수 있을 때만 나는 나/복돌이의 유일성 즉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각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고민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대치되어야 한다. "나/복돌이는 누구/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나/복돌이는 곧 나/복돌이의 고민이며, 그 고민의 깊이와 밀도이다"라는 명제라는 것이다.

왜 인간은 고민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행복한 돼지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의 삶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냥 물질, 그냥 짐승이 되기 싫기 때문이다. 왜 나/복돌이의 정체성이 중요한가. 대답은 단순하다. 나/복돌이가 다른 수많은 인간과 상품처럼 대치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상품과 같은 물건이 아니라 유일한 실존적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확인할 내적 요청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주체다. 주체가 섰을 때만 나의 자유를 확인하고, 자유는 선택을 요청하고, 선택은 고민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고민이 없는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가치, 그것이 함의하는 어떤 원칙에 따라 행동하되, 부단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경우에 따라 용감하게 그 원칙까지도 바꾸면서,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이다. 그러므로 고통 없이는 주체를 세우고 지킬 수 없다. 누구나 불행한 소크라테스보다는 행복한 돼지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 항상 빠지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자 하는 한 고통과 고민을 도피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라. 온 몸이 찢어지듯 고민하라. 너무 늦기 전에 고민하고 선택하라. 때가 지나면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이 없다. '나'의 주체는 곧 나의 고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4회: 속물과 귀족의 구별은 있다

정체성이 분명한 경우에만 나는 인간으로서 실존한다 할 수 있고, '나'의 정체성은 '나'의 주체적 선택을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살아가는 동안 부단한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선택이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자유를 피할 수 없고, 자유가 책임을 함의하기 때문에 선택은 고민을 동반한다. 이런 점에서 인생은 곧 고민이다. 인생이 곧 고민이라는 사실만은 나의 자유스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운명이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유, 선택, 고민만은 선택의 밖에 있다.

나는 해가 가면 나이를 먹고, 학교에 다니게 되며, 대학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대학에 간다면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를 지망할 것인가, 대학졸업 후에는 어떤 직장으로 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아무도 도피할 수 없다. 나이가 더 들면 결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결혼을 결정할 경우 어떤 상대자와 할 것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가 대학을 가야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를 가느냐에 따라, 어떤 직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혼이냐 독신이냐에 따라, 나의 인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대학으로 진학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는 시골에서 농부로서 혹은 공장에서 노동자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고, 대학에서 어떤 학과를 지원하느냐에 따라 나는 평생 가난한 시인으로 살거나 고급관리나 첨단과학자가 되어 물질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살 수 있으며, 어떤 직장을 택하느냐에 따라 나는 학자로서의 조용한 삶이나 사업가 혹은 정치가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다. 결혼하느냐 독신으로 사느냐에 따라 나는 남편, 아버지로서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거나 고독하지만 고고하게 살 수 있다. 모든 주위 사람들, 모든 상황에 어떤 태도로 어떻게 대처하며 사느냐에 따라 나는 선하거나 악한 사람, 점잖거나 속물적 인간이 될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나의 선택의 총체는 곧 나의 정체성이다. 선택이 언제나 그때 그때의 특정한 가치의 선택이며, 한 사람의 이러한 가치의 선택은 그 사람의 궁극적 가치, 이상적 인간상 즉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전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인생관을 반영한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의 삶의 목표를 정해야 하고, 그에 비추어 가야할 대학, 전공할 과목, 몸담아야 할 직장, 결혼 혹은 독신생활, 배우자 등 구체적인 선택들로 나의 정체성 즉 내가 바라는 고유한 나 자신의 삶의 선택을 해야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결정할 객관적 근거가 없고, 어떤 삶, 어떤 정체성 즉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객관적 근거를 절대로 댈 수 없다는 데 있으며, 이 문제는 한 종류의 정체성을 선택함은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어렵고 심각하다. 나는 한편으로는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 대학교수가 되어 결혼도 하고 비교적 안정된 행복을 누리고 싶지만, 시인이 되어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자유분방하게 작품을 쓰고 가능하면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대로 살고 싶기도 하다. 나는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일하고 경우에 따라 목숨도 바치는 삶의 고귀한 의미를 인정하지만,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아 남을 지배하면서 나의 물질적, 동물적 욕망을 마음껏 채우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동시에 두 가지를 다 선택할 수 없고, 선택은 언제나 하나만의 선택이라는 사실이 선택을 한결 더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학교, 학과, 직업, 결혼 등의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라 도구적인 선택이다. 관리나 대학교수가 노동자나 농부보다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가나 고관들의 삶이 재산을 많이 모은 사업가의 삶보다 더 귀하다는 근거도 없다. 교수로 상징되는 지식의 개발이 없는 개인이나 사회는 그만큼 빈곤하고, 돈을 벌어 오는 사업가들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정치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농부가 농산물을 생산하고, 공장노동자들이 공산품을 제조하지 않으면, 교수나 정치가는 생존할 수 없다. 여러 가지 활동자체, 직업적으로 분야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서로 상호의존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어떤 활동, 어떤 직업, 어떤 사람들이 더 가치가 있고 바람직하고 더 고귀한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관점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대학진학, 대학에서의 전공, 직업 등의 선택은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 원초적, 근원적 선택이 아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공부, 똑같은 직업을 갖고 있어도 그들의 인생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관은 전혀 다를 수 있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학교, 과목,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그들의 인생의 인생관,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관은 완전히 일치할 수 있다. 우리가 택하는 삶의 구체적인 길과 방법은 우리가 내적으로 추구하는 무엇인가 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이고, 과정이며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궁극적 목적이 똑같다 하더라도 각자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 성장한 배경, 가정적, 사회적, 역사적 상황이 다른 만큼 그러한 목적 및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과 절차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달라야 하며, 따라서 한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학교, 과목, 직장의 선택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달라야 한다.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인생관을 갖고 있더라도 그 두 사람이 선택하는 학교, 학과, 직장, 배우자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택이 인생의 근본적인 선택도 아니며, 그런 선택에 동반되는 고민이 근본적인 고민도 아니다.

학교, 학과, 직장, 배우자의 선택이 불가피하고 중요하지만, 그 선택은 인생에 대한 더 총괄적인 비전, 인생의 총체적 의미에 대해 각자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원초적 선택을 전제하고 반영하며, 역으로 이러한 근본적 가치관의 원초적 선택이 위와 같은 구체적 선택들을 결정한다. 선택과 선택에 동반되는 고민은 불가피하지만,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가치관 즉 이상적 삶, 가장 인간다운 삶에 대한 비전의 선택이며, 인간이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민은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가치관 즉 이상적 삶의 비전, 즉 '나/복돌이'가 궁극적으로 어떤 인간으로서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치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바라야 할 무엇인가를 뜻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을 갖고 태어난다. 나는 돈환처럼 쾌락만을 추구하고 싶은 동시에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해 금욕적으로 봉사하고 싶은 충동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벌거나 출세를 하고 권력을 누려보고 싶지만, 그러한 것을 억제하고 학자로서 무한히 넓은 정신의 세계에서 진리만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도 갖고 있다. 나는 죽으면 그만이니 아무리 저속한 방법으로라도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와 반대로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위신을 잃지 않고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지만 '고귀한 품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조를 지키고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나의 욕망, 나의 가치관이 항상 서로 상충한다는 데 있다. 나는 학자의 길과 사업가의 길을 동시에 갈 수 없으며, 쾌락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나는 동시에 저속하면서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근본적 문제는 막상 따지고 보면 상반되는 욕망, 가치, 인간의 속성 가운데에 어떤 것이 더 옳고,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궁극적으로 아무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가장 궁극적 인간의 실존적 고민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궁극적 잣대는 '저속성/고귀성'이라는 정신적/도덕적 속성이며, 저속한 삶보다는 고귀한 삶이 더 바람직한 즉 가치 있는 삶이며, 하늘과 땅이 다같이 아름다운 자연이더라도 하늘은 땅보다 역시 더 높고 푸르며, 높고 푸른 하늘이 땅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하다. 이러한 사실은 생각하고 반성하는 이에게 자명하다. 생각해봐야 한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자.

우리 시대는 쾌락만을 좇는 속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럴수록 속물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신적 귀족이 되어야한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나/복돌이'는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자면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한다.

5회: 모든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대부분 진짜 놀라움이나 진정한 감동이 없이 흘러간다. 철이 나면 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보통 우리는 특별한 의식 없이 그냥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코를 킁킁거린다. 산이나 구름을 보거나, 천둥소리와 TV 방송을 듣거나, 구린내나 향수 냄새를 맡거나 해도 마찬가지다. 상대성원리를 배울 때나 노자의 철학을 읽을 때, 장가 시집을 가거나 애를 낳거나 죽음을 당할 때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고 물리적으로 그냥 반응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리 팔팔하게 활동하고,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마찬가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모든 그대로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자명하다.

그러나 정말 잠을 깨서 살아나고, 정말 눈을 떠서 사물을 보고, 정말 귀를 기울여서 소리를 듣고, 정말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무엇인가에 대해 절실한 느낌을 갖고, 정말 머리를 써서 생각할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쳐올 수 있다. 이 때 산은 산으로 보이지 않고, 방송소리는 방송소리로 들리지 않고, 구린내는 구린내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전의 삶과 죽음이 아니고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며, 산은 산이 아니며, 물은 물이 아니고, 그 아무 것도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자명하지도 않게 된다. 나 자신이 알 수 없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바뀌고 한없이 이상해지며, 느끼고 생각할수록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놀랍고 신기하다.

이제 나는 잠을 깬다. 처음으로 나는 산과 바다, 사람과 동물, 삶과 죽음, 내 자신과 남들, 컴퓨터와 책상을 본다. 처음으로 나는 바람과 물, 구름과 새들의 노래 소리, 나 이외의 사람들, 동물들, 초목들, 현상들, 사물들의 언어를 듣는다. 처음으로 나는 꽃과 쓰레기, 인간과 동물, 산과 바다, 땅과 하늘, 달과 별들의 냄새와 향기를 맡는다. 처음으로 나는 모든 것들한테서 깊은 감동을 받고, 흐뭇한 희열감을 체험한다. 나는 비로소 존재하고 비로소 살아난다.

산과 나무와 동물이 있다는 사실, 부모가 있고 내가 그 부모들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성장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꽃과 한 폭의 그림이 아름답다는 사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 나나 네가 큰소리도 치고 고상한 말들을 하다가도 어느 연령이 되면 개나 돼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에 잡히고 몇몇 특별한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 그런 짓을 한다는 사실, 부모가 죽고 때가 되면 나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 인간이 한편으로는 자연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인간과 싸우면서 긴 역사를 거쳐서 살아남아 문명을 일궈 왔다는 사실, 내가 닭이나 돼지나 소를 잡아먹는다는 사실, 풀을 먹고사는 메뚜기를 개구리가 잡아먹고, 그런 개구리를 뱀이 먹고산다는 사실, 모든 생물이 교배를 통해서 번식한다는 사실, 산과 바다, 식물과 동물이 살아 있다는 사실, 무엇인가의 존재가 보이고, 무엇인가의 소리가 들리며, 무엇인가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 그러한 것에 대한 느낌, 감동, 생각이 있다는 사실, 지구, 달,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우주가 있다는 사실, 자연현상이 정확하고 엄밀한 수학적 언어로 재현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 있다는 사실, 아니 라이프니츠와 하이데거의 말대로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었을 터인데도 도대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찌 놀랍고 경이롭고 신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어쨌든, 한 차원 높은 차원에서 그 대답이 보여주는 사실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이 다시금 제기될 때 모든 것은 더욱 경이롭고, 신비로우면서 아름답고, 당혹스러우면서도 황홀하다.

의식하고, 느끼고, 감동하는 모든 것이 경이로운 것은 이 경험이 나에게는 처음이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이 신비로운 것은 그 경험 대상이 궁극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것이 어떤 질서와 조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황홀한 것은 그 존재, 그 존재의 질서와 조화가 다같이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있는 어떤 요청을 충족시켜 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가. 지금까지 나는 산과 바다가 있고, 동물과 인간이 있고, 아버지와 자식이 있으며, 탄생과 죽음이 있다는 사실, 내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고, 새가 버러지를 찍어 먹고,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사실에 한번도 놀라본 적이 없었는가. 지금 나는 처음으로 이러한 놀라움을 경험한다.

인류가 생각을 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존재의 기원과 목적, 우주의 구조와 운명의 원칙, 사물현상의 속성과 법칙, 수많은 개별적 존재나 현상들의 인과적 관계, 인식에 있어서의 의식과 그 대상의 논리적 관계, 인간과 동물, 나와 너의 존재 원인이나 이유, 도덕적 혹은 미학적 경험과 가치에 대한 설명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과학적 이론도 위와 같은 사실, 현상 그리고 경험에 대해 만족스런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더욱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 대해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투명하게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이 무질서한 혼돈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경이롭고 신비스런 모든 존재, 현상 그리고 경험 속에서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이 막연하나마 전제하거나 주장하는 것들 중에서 어떤 질서와 조화를 피부로 직관한다. 그러기에 나는 언뜻 보아 혼돈 자체만 같아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질서를 느낀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어쩌면 그 가운데서 가장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어째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도대체 무엇인가가 있느냐의 물음 그 자체이며, 어쩌면 이 물음보다도 더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러한 물음을 던지는 인간, 인간의 의식, 인간의 지적 능력인 듯하다. 그 원인이나 이유를 정확히 의식하거나 설명하거나 파악할 수 없지만 나는 이런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그냥 저절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적, 정서적, 미학적 충족감을 체험한다. 그러기에 지금 나는 모든 존재, 현상, 경험에서 황홀감에 도취된다, 눈을 씻고 크게 떠서 사물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귀를 깨끗이 후비고 사물들의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코를 깔끔히 풀고 사물들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기 때문이다. 피부로 깊이 처음으로 감동하고 지적으로 투명하게 처음으로 직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뜻에서 잠을 깨고 진정한 뜻에서 살아있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 올 때까지도 나의 머리, 눈, 귀, 코로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나는 공학박사, 대학 교수, 큰 회사의 사장, 장관이 되었어도 나의 의식이나 감각, 아니 나 자신의 존재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열심히 책, 돈, 권리만 보고 살아왔다. 나는 백발이 되어 죽음이 가까운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자연, 우주, 그리고 존재와 그러한 것들의 궁극적 의미를 보지도, 듣지도, 맡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보통 우리는 이처럼 동물같이 살다가 죽다가 물건과 같이 존재하다가 없어진다. 코 밑 잎만 보느라 나무를 못 본 채 나무를 보았다고 착각하고, 잡음만 듣고도 음악을 들었다고 잘못 믿으며, 퀴퀴한 구린내만 맡고 치즈 냄새를 맡지 못하고서도 치즈 냄새를 좋아한다고 헛 믿는다. 있는 대로 보지도 못하고, 소리나는 대로 듣지도 못하고, 냄새나는 대로 맡지 못하는 우리는 진정한 경이, 신비,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정말 느낌이 없이 존재하며, 느낌이 없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들어 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다. 잠을 깨고 살아나자.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나를 보며, 내가 귀를 청소하고 사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사물들이 또한 내게 귀를 기울인다. 코를 대고 존재의 체취를 맡으니 또한 존재가 코를 대고 나의 체취를 맡는다. 모든 것은 무한히 이상하고 신기하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맡으면 맡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렇다. 감동이 깊으면 깊은 만큼, 생각이 투명하면 투명한 만큼 한결 더 그렇다. 정말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하고 경이롭다.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새로 보자. 귀를 깨끗이 씻고 소리를 새로 듣자. 머리를 식혀 새로 생각해 보자. 세계는 지금과는 달리 무한히 신기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황홀한 감동의 원천, 투명한 인식의 대상으로 바뀔 수 있다.

6회: 알 것은 많고 배울 것은 무한하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랄 만큼 신비스러운 세상의 방대한 모든 것이 나의 호기심을 무한히 자극한다. 그것이 나를 지적 잠에서 깨워 눈을 뜨게 한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 그리고 나 자신의 의식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 현상, 사건, 생각들 하나 하나가 한결같이 나의 지적 욕망에 불을 지펴 그 모든 것을 알고 배우고 싶은 심정으로 몰아 넣는다.

이웃 아가씨의 이름은 무엇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감은 언제부터 그리고 어째서 저렇게 아름다운 색깔로 변하게 됐는가. 저 산너머에는 무엇이 있으며, 이 동네를 벗어나면 어떤 동네가 있고, 바다를 건너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나라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궁금하다. 밤과 낮이 어떻게 바뀌는지, 비가 왜 오는지, 원자나 유전자의 구조와 그 존재 원리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어째서 꽃은 아름답고 쓰레기는 추한가? 뉴턴의 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원자의 물리학적 구조, 유전자의 생명공학적 구조, 인간복제의 원리도 알고 싶다. 아득한 옛날부터 나의 조상이 살아 왔고 내가 태어난 한국의 역사, 유럽 문명의 원천인 그리스의 문화, 인류의 역사도 알고 싶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저곳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싶다. 도서관에 꽂혀있는 저 수많은 책들 그리고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저서들이 어떤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가를 알고 싶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사회학, 예술, 물리학, 생명공학, 수학 등 모든 학문을 모두 샅샅이 배워 알고 싶다. 진리, 미, 선, 앎 등 숱한 개념들의 정확한 의미도 밝히고 싶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 윤회의 사실성도 알고 싶다. 태생과 죽음,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아니 존재 자체를 알고 싶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것들의 궁극적 의미도 알고 싶다.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철저히 투명하게 알고 싶다. 정말 세밀하고 정확하게 알고 싶다. 알기 위해서 한없이 그리고 철저하고 정확하게 배우고 싶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지도 알고 싶다.

나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많은 학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고, 그들의 책을 읽고 배워왔다. 그들의 지식은 방대하고 깊다. 들어야 할 강의 제목, 읽어야 할 책의 양, 그런 강의와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쏟아야 할 시간과 바쳐야 할 노력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세상의 비밀과 존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나는 무한히 많은 시간을 강의 시간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하고, 무한한 시간을 독서하는 데 바쳐야 한다. 남들한테서 그리고 책에서 배울 것이 끝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것들을 보고,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한테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수많은 날을 학교에서 공부했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가 되었고, 교수가 되었다. 지금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배우고 거의 알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적도 있다. 모든 것이 그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와 아울러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현상에 대한 뜨거운 지적 호기심의 열도가 식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나만이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변화를 성숙, 지혜, 도통, 해탈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정신적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이를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지적 미숙으로 평가절하 한다. 이런 태도는 보통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긴 사상사를 통해서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모든 것을 배우고 알았다고 확신하고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소유했다고 확신했으며, 종교인들은 절대적 신, 영혼, 초월의 세계까지를 알았다고 자신하고 그것을 믿어왔으며, 현재에도 그러하다. 이러한 철학자나 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앎, 진리에 대해 더 이상 타오를 열정이 남아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모든 신념은 자명하고 확실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실들이 결코 나에게는 확실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앎과 그들이 믿고 있는 진리도 불투명하다. 내가 배운 것이 아무리 많고 내가 아무리 깊은 것을 느꼈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지 사실일 수 없다. 잠깐만 돌이켜 보아도 내가 듣고 읽어 얻은 지식의 양은, 뉴턴의 말대로, 모래밭의 무한에 가까운 모래의 양에 비해 단 한 알의 모래알에도 미치지 못하고,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모래알에 대한 나의 앎의 깊이는 아무리 깊어도 수박 겉껍데기의 깊이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신을 차려 눈을 똑똑히 뜨고 보면 세상에는 아직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할 만큼 배워야 할 것이 무한히 많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야 할 만큼 현상들에 대한 앎의 깊이는 무한히 깊다. 아직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시피 하며,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신념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의, 많은 고령자들의 잘못된 생각처럼 또는 믿는 대로, 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의 환상적 신념처럼 나 또한 모든 것은 아닐지 몰라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잘못 믿어왔고, 많은 것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자부해 왔지 않았던가. 아직까지 나는 지적으로 안이하게 살아왔지 않았던가. 이제 조금만 반성해보면 나의 호기심은 생각보다 부족했고, 나의 앎에 대한 정열은 스스로 자부해 왔던 것보다 시들했고, 나의 진리에 대한 탐구력은 스스로 자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철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보면 볼수록 볼 것이 너무 많고, 들으면 들을수록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들어가야 할 진리의 깊이는 너무나 깊다. 배워야 할 것들의 무한에 가까운 양을 생각하면 내가 배운 것은 무에 가깝고, 참된 앎의 빛의 무한에 가까운 광명에 비하면 내가 갖고 있는 앎의 빛은 아직도 암흑에 가깝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과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배우고 알아야 하겠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인생이 너무 헷갈린다. 그러므로 나는 더 배우고 더 알아야 하겠다. 아직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배움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무한한 기쁨을 배웠으며, 앎이 나에게 주는 무한한 환희를 알았다. 배움의 기쁨은 진리를 접하는 기쁨이며, 앎의 환희는 진리의 빛을 경험하는 환희이다.

배움과 앎은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에 대한 강렬한 지적 호기심, 진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전제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없이 방대하고 다양하며 깊다. 나는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다 배우고, 한꺼번에 그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정말 새로운 배움과 앎에 내 호기심이 집중되고, 나의 지적 추구가 철저해야 한다.

호기심이 흩어져서는 안 되겠다. 앎에 대한 정열이 해이해져서는 안 된다. 진리에 대한 충성이 식어서는 안 된다. 배움과 앎을 위해서라면 식사, 잠, 마누라, 자식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앎을 위해서 가족, 나라를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진리가 가져오는 기쁨을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지적 역사를 통해서 이런 이들이 적지 않았다. 투명한 세계, 진리를 위해서 인생의 도박을 걸었다고 자부했던 나 자신을 뒤돌아보며 나는 내 삶에 충실히 집중하지 못했고, 내 자신에 충분히 철저하지 못했던 사실을 뒤늦게 후회스럽다고 의식하고 부끄럽게 느낀다.

배울 것은 끝이 없고 알 것은 무한한데 나는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채로 머지않아 이 세상, 한없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실이 아쉽다.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다시 배움과 앎의 길을 선택하고, 그 때에는 이번과는 달리 정말 후회 없이 그 길을 투철하고 충실하게 걸어 보리라. 배움은 길이며, 앎은 빛이다. 진리는 오직 그 길과 그 빛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배움과 앎의 길이 끝없이 펴져 있고, 찾아야 할 진리는 무한하다. 진리는 기쁨의 원천이다.

지식정보시대는 언뜻 보기와는 달리 인간의 호기심에 진리가 아니라 돈과 돈을 위한 경쟁에 쏠리고, 배움과 지식이 도구로 전락해가고 있는 시대에 지나지 않다. 지식의 급증과 정보교환의 범람으로 세상이 더 어둡고, 삶이 더 헷갈린다. 그럴수록 모든 것을 정말 알아 투명하게 밝히고 싶은 욕망에 나는 사로잡힌다.

7회: 아무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하나를 보면 둘이 안 보이고, 한 소리를 들으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하나를 읽으면 다른 것이 읽히지 않는다. 어떤 것을 보고 한 사람은 산이라 하는데 다른 사람은 물이라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이 사람은 음악이라 하는데 다른 이는 잡음이라 하며, 어떤 낱말의 뜻을 놓고 '개'라 하는데 다른 이는 '소'라 한다. 산과 물이 따로따로는 보여도 그 둘이 전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고, 바람 소리와 음악 소리를 따로따로는 들어도 그 둘이 합쳐서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으며, 한 낱말과 한 문구의 의미가 따로따로는 이해되어도 그것이 합쳐 이룩된 문장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래도 저래도,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이 것도 저 것도, 이 경우 저 경우도 따지고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인류는 역사적 경험과 삶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알았다고 믿어 왔다. 선배와 선생님의 신념이 옳은 것 같고, 점술가들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이 보인다. 과학자의 설명이 정확해 보이고, 깊은 진리에 대한 철학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종교인들의 신앙이 더 심오한 설명을 해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예수의 말이나 노자의 주장, 기독교의 설교, 부처의 가르침, 공자의 생각이 한결같이 옳은 것 같다. 나나 너나 사람마다 개인적으로는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위와 같은 것을 배워서 세계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배움은 과연 옳은 것이며, 우리의 앎은 정말 진리인가.

알고 보면 똑같은 것을 놓고도 내가 본 것과 네가 본 것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 선배와 선생의 지식은 흔히 서로 맞지 않는다. 같은 자연현상을 놓고도 점술가들과 과학자들의 설명은 흔히 상충한다. 똑같은 자연현상을 놓고 점술가들은 어떤 영적 존재의 조작으로 설명하는데 반해서 과학자들은 기계적 법칙의 작동으로 설명한다. 죽음과 삶, 영혼과 영원에 대한 생각에서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흔히 어긋난다. 한 편에서 그러한 것들의 실재성을 믿는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과학 안에서조차 물리적 현상에 대한 뉴턴의 삼차원적 설명과 아인슈타인의 사차원적 설명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철학 안에서도 실체에 대한 플라톤의 이원론적 관념론은 노장의 일원론적 자연주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종교 안에서도 기독교가 주장하는 절대적
2005/03/26 01:47 2005/03/26 01:47

숭산스님의 미국인 여성 제자 성향 선사
벽안제자 수행 돕는 자상한 어머니




성향 선사.

"보살의 서원은 나를 필요로 하는 어디든지 가라고 요청합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이라도 달려가 중생을 구제하라고 서원을 일깨웁니다. 그 서원에 따라 나의 파트너와 딸들과 함께 병원에서 일할 때나 무엇을 하든 나는 그것을 수행으로 여깁니다."

화계사 조실 숭산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의 초기 미국인 제자이자 조계종 재미홍법 관음선원(Kwan Um School of Zen, 원장 숭산)의 부원장인 성향 (미국명 Barbara Rhodes) 선사. 미국에서 가장 먼저 공식적인 선사(Zen Master)로 인가(1992년)받은 여성 중의 한 명인 그녀는 선사이자 간호사로서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겸한 독특한 선 수행자다.

1972 년부터 관음선원 설립자인 숭산 스님으로부터 참선을 배운 성향 선사는 1977년 지도법사(Dhamma Teacher)로 임명됐다. 1992년 10월부터는 미국 관음선원의 부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플로리다, 시카고, 콜러라도, 코넥티쿠 등지의 선센터와 선모임의 지도법사도 겸임하고 있다.

Bob rich와 함께한 성향 선사.



1969년부터 로드 아일런드(Rhode Island)의 가정과 병원 등에서 말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종간호를 펼치고 있는 간호사이기도 한 그녀는 선사로서 보기드문 수행이력을 보이고 있다.
선사이자, 어머니, 간호사로서 1인3역을 하고 있는 그녀는 숭산 스님으로부터 참선과 함께 관음보살의 자비와 지장보살의 원력을 배웠다. 성향 선사는 임종간호를 통해 수도 없이 힘겨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중생 구제의 원력으로 시련을 극복해 왔다. 그녀의 능숙한 해결을 기다리는 많은 곳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지도하며 그녀는 어떤 상황, 어떤 사람들이 원하더라도 기꺼이 가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지옥에서 누군가를 구하려 한다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스승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 성향 선사는, 자기 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해 왔다.

"숭산 선사는 제자들에게 헌신적인 사람이 되라고만 하지 않았죠. 큰스님은 자기 자신을 믿고 강해질 것을 원했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책임있는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어요. 선(禪)에서 자신을 믿고 자신이 누군가를 찾는 것은, 무아(無我)를 확인하는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무명(無明)을 깨쳤다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남을 돕는 것임이 명백해질 거예요." 성향 선사의 자비실천은 '이 뭣고' 화두를 챙기는 수행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숨쉬고 있는 매순간 '이 뭣고'를 찾는 참선으로 '어디를 가든 주인이 되는 수처작주(隨處作主)를 실현하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란 의문은 당신을 매순간 진실로 이끕니다. '이 뭣꼬'란 화두는 모든 것에 만족하는 마음 상태를 갖게 하죠. 지혜가 개발될 수록 지족(知足)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것은 당신이 어디로 다음 걸음을 떼어야 할 지 알게 합니다. 당신은 다른 곳에 있거나, 다른 사람이거나, 다른 무엇을 해야 한다고 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순간순간, 당신이 직면하는 그 무엇에서 배워야 해요."

화두 참구가 보살행의 실천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을까.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 둘이 아님을 부처님께서는 누누이 강조하셨지만, 그 적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두 참구가 보살행의 실천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을까. 성향 선사는 이 난제를 이렇게 헤쳐나갔다. 그녀는 세계적인 불교잡지 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모든 사람들을 돕겠다는 보살의 서원을 세웠다면, 새로운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하지?'라고. 우주는 매우 관대하죠. 조금만 주의를 귀울여 듣는다면, 그 대답은 저절로 나타날 것이고 사명감은 저절로 떠오를 것입니다. 당신이 고른 직업과 사명을 명석하게 자비심을 갖고 처리하세요. 어디로 한 발 내딛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한, 당신은 결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살행을 펼치되 언제나 '이 뭣고?'를 질문하며, 수행해야만 합니다."

성향 선사는 임종간호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종말을 지켜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감기직전 스스로에게 "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시간은 다 어디로 가버린거야?"라는 질문도 못한 채 일생을 떠나보내고 만다. 성향 선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죽어가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향 선사는 마음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바른 처방을 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성향 선사는 봄날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생기 있는 불법(佛法)에 대한 지혜를 숭산 스님으로부터 받아들였고, 이를 다른 이에게 전하려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스승의 가르침 그대로 어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제자들에게 따뜻한 가르침을 편 성향 선사는, 그들이 자기자신을 이해하고 본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이끌어주었다.

1972 년 숭산 선사의 제자가 된 후 30여년간 공부하면서, 어느덧 성향 선사는 숭산 스님을 닮아 있었다. 관음선원 원장 숭산 스님을 보좌한 부원장으로서, 세계 32개국 120여 개 홍법원 산하 5만여 벽안 제자들의 수행 정진을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지도해 온 것이다. 성향 선사는 처음 숭산 선사를 친견했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숭산 선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히피였습니다. 끈 모양의 긴머리에 더덕더덕 누빈 청바지를 입고 쌀과 콩만 먹는 배타적인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향 선사는 선원에서 몇 주일을 살았는데, 스승의 가르침이 얼마나 깊고 노련하며 유머러스한 지를 알게 되었다.

"스님은 언제나 어떤 질문에도 기꺼이 응답하셨습니다.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면, 젓가락으로 질문을 한 제자의 머리를 톡 치면서 말했습니다. '너무 생각이 많아! 내려놔, OK?'"

이것이 컵이냐, 아니냐 하는 속임수에 걸리지 않고 컵을 들고 마시면 되는 경지를 일깨워준 숭산 스님의 '문없는 문'의 관문을 통과한 성향 선사는, 그간의 수행을 이렇게 회고한다.
"숭산 선사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 즉, 위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기에, 보다 완숙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Tricycle과의 인터뷰 중에서)
2004/12/03 17:34 2004/12/03 17:34

모든 이들의 안락을 위하여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9



- 30개국 125선원에 ‘전법 주장자’-

1992년 10월 10일.
미국 프로비덴스 컴벌랜드 다이아몬드 언덕에는 화사한 햇살이 불광(佛光)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13만평의 대지 가운데 우뚝선 평화의 탑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2년만에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탑의 준공식을 하는 날이기도 했지만 재미 홍법원 프로비데스 선센타 개원 20주년 기념법회도 있었다. 거기다 숭산행원스님의 제자로는 처음으로 3명의 선사가 태어나는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행원스님은 미국땅에 포교의 당간을 세운날로부터 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홍콩에서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폴란드에서 독일에서 그야말로 종행무진 달려야 했던 전법의 나날들이 쏜살처럼 물처럼 흘러 가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동안 스님의 전법 당간지주가 선 나라는 30여 곳이나 됐고 선원은 1백25개소가 문을 열었다. 각국의 제자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짓일만큼 의미가 없었다. 그저 누가 물으면 “수만명이 되겠지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시가 되자 평화의 탑 준공식이 바로 시작됐다. 각국의 제자들과 한국의 스님들이 참석했고 캄보디아의 고사난다등 불교지도자들도 대거 동참해 대규모 야외법석을 장엄했다.

다시 웅장스런 법석은 엄숙한 전법의 법석으로 옮겨졌다. 푸른 잔디밭에 마련된 전법식장에는 1천여 사부대중이 정좌하고 앉아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행원스님의 이방인제자 3명의 선사가 탄생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이들과 함께 삭발제자가 된 사람은 25명이나 되지만 오늘 전법식을 받는 3명의 제자는 선사란 법계를 잇는 의식을 맞고 있는 것이다.

“너는 어떤 찌꺼기냐”
“나는 머리도 있고 발도 있다”
이렇게 시작된 문답에서 행원스님의 간을 도려내고 심장을 들춰낸 3명의 제자는 10년이 넘게 닦아 온 자신들의 마음자리를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면 금바람이 불어서 나무의 본체가 드러난다. 내가 처음 세탁소에서 일하는 스승님을 만났을때 금바람이 불었다….”
법을 이어받은 성해보문(性海普門) 법사의 법문을 듣는 1천여 사부대중들은 사뭇 진지했다. 무등수봉법사와 법음성향법사도 전법의 기쁨을 간략히 법어로 피력했다.

다이아몬드 언덕에 가을색이 아름다운 이날 프로비던스 선센타에 모인 대중들은 행원스님의 전법 노정에 더욱 큰 인연들이 깃들어 온세계가 불광으로 장엄되길 기원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85년부터 4년 주기로 세계일화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세계의 불자들이 수덕사 도량을 가득 채우고 세계일화의 법향을 드리우는 이 법회는 만공스님의 세계일화 정신을 실현시키기 위한 자리다.

스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 법석이 마련 됐다. 제자들이 전법의 마당을 넓히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지구촌의 생명들이 모두 경건한 합장을 하는 한 스님의 법석은 먼지가 쌓일 틈이 없는 것이다.

전법을 받고 기뻐하는 3명의 선사들을 보며 행원스님은 문득 85년도 가을에 중국 북경 시내의 고찰 법원사에서 만났던 전인(傳印)스님 생각이 났다.

그 고색창연한 절에서 행원스님은 전인스님에게 물었었다.

“스님, 이 절에는 많은 부처님들이 계신데 어느 부처님이 진불(眞佛) 입니까.”“부처가 없는 곳도 급히 지나가고(無佛處 急須走過) 부처가 있는 곳에도 머물지 마십시요(有佛處不可停留).”
정작 부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새로 태어난 제자들도 이미 부처의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전법의 현장으로 달려갈 것을 행원스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늘어나는 제자들. 늘어나는 선원과 신도들. 그것은 행원스님이 또다시 전법의 길로 나서야 하는 이유였다. 아직 스님이 가서 부처님법을 전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곳은 이 지구상에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도 반드시 가야할 곳, 반드시 가서 법석을 펴야할 곳이 있다.

그곳은 다름아닌 한반도의 북쪽 땅이다.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공산국가를 다 가봤으나 오직 한 곳 가지 못한 북녁하늘 아래에 행원스님은 주장자를 높이 세우고 싶은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눈빛이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부처님의 소식을 전했는데 그리운 고향땅 생각만해도 가슴 아픈 고향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찬란한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는 이 현실이 행원스님에게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다.

바로 그 고통이 있기 때문에 행원스님은 전법의 주장자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2004/12/02 17:33 2004/12/02 17:33

폴란드에 선원 개원…유럽포교 교두보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8



- 英·스페인·브라질· 佛 등에도 포교 -

미국 포교가 홍법원을 중심으로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제자들은 법사로도 품수받고 입승·원주등의 소임을 맡기도 해 선원마다 운영이 잘 되는 가운데 선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럴즈음 행원스님의 발길이 폴란드로 이어지고 있었으니 동구권 포교의 시작이 된 것이었다. 1978년 미국에서 제자가 된 안토니오교수(클라우대 심리학)의 안내로 처음 폴란드를 둘러보게 되었다. 폴란드는 공산국가였으므로 공항문을 나가는 일부터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안토니오교수를 통해 알게된 그곳의 교수, 미술가, 음악가등이 스님을 맞이했다. 말하자면 폴란드의 전법은 그들 엘리트들의 불교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란 나라가 종교활동은 자유이지만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고 보면 불교를 전하는 일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오랫동안 불교 자체가 인정못받는 수난도 감안해야 했다. 불교가 인정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자도 극히 적고 전법할 성직자도 없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주로 불교를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젊은 청년층이거나 여행을 많이하는 예술분야의 인사들이라 반국가적 행동이 뒤따를 수 있다는 일종의 정치적 불신도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숭산스님을 만난 젊은이들과 교수, 예술인들은 불교의 선수행과 그 의미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의 노력으로인해 월샤와에 홍법원을 개설하게 됐다. 월샤와 홍법원은 안토니오교수와 제이콥등이 열심히 이끌었다. 이듬해부터 미국의 신도들과 행원스님이 매년 방문해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므로 폴란드에도 여기저기 선원이 문을 열게 됐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78년에는 도달사와 도명사가 문을 열어 16명에게 5계를 설해 폴란드 선불교의 뿌리가 내려졌고 이듬해에도 심춘사가 창건되어 신도를 1백명에 이르게까지 포교를 했다. 80년에는 우체에 심명사를 열고 37명에게 5계를 설했고 81년에는 루브린의 심각사를 비롯해 심오사, 오도암이 각각 신설됐다. 이처럼 각지에 선원이 생기면서 순례법회도 자주 갖게 되었다.

“생(生)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생은 한낱 허공에 이는 흰구름과 같고 사(死)란 흰구름이 허공에서 없어지는 것과 같다. 사람이 오고 가고 살고 죽는 것 모두가 저 흰구름과 같이 허망무실할진대 무엇을 삶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물건이 있어서 그 놈은 맑고 깨끗하여 생사에 따르지 아니하니 그 맑고 깨끗한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제이콥의 통역으로 법문을 듣는 폴란드의 젊은이들과 교수, 예술가들은 목에 침을 꿀꺽덕 삼키며 다음에 이어질 스님의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禪)이란 나 자신을 발견하여 대우주의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아 만중생의 마음속에 대광명을 밝혀주어 참다운 인생, 영원한 생명, 즉 ‘참나’ 속에서 생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여 고해의 중생들을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건져 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확신시키고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생사마저 초탈하는 큰 지혜의 성취가 선이란 소식을 동방의 한 스님에게서 전해들은 폴란드의 지성들. 그들은 줄곧 말이 없더니 스님이 “이제 다들 아시겠는가. 그래, 그대들에게 들린 나의 이야기는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그대들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는가, 좋은 것이 원래부터 좋은것이었고 나쁜것은 원래부터 나쁜 것이었는가, 어디 대답을 해 보시라”고 독촉하니 놀라움을 탄하는 소리만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선불교의 길을 엿보기 시작한 폴란드의 불자들. 그들은 각지역 선원에서 지도를 받으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폴란드 포교는 달릴수록 계속 힘을 받으며 가속력을 더해갔다.

다음의 전법지는 영국이었다. 폴란드와 같은해인 78년에 서백림 무문선원을 연 사람은 종철법사였는데 그곳을 교두보로 영국포교도 씨앗을 틔워 잎돋고 줄기가 자라기에 이르렀다. 그 잎과 줄기는 80년의 런던선원 개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종철법사는 독일인 내과의사로 정신과, 침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일본식 참선을 오래 배웠었다. 그러나 행원스님을 만난이후 한국선의 종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런던선원에이어 다음해에는 스페인 팔마에 선원을 열었고 82년에는 미국에서 세계평화종교지도자대회를 개최했는데 대성황이었다. 로르 아일랜드 뉴헤븐선센터에 세계 19개국 불교지도자가 참석해 세계평화를 위해 불교가 제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다짐을한 이 대회는 행원스님의 세계전법의 중간 결실이기도 했다.

이어 83년에는 브라질 쌍파울로에, 2년 뒤에는 프랑스 파리에 선원 달마사를 개원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이건 전법의 물줄기가 흘러들 길은 있었고 그 물을 기다리는 목마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행원스님에게 국경을 넘어서는 전법여행을 계속하게하는 하나의 당위이자 격려이기도 했다.
2004/12/02 17:32 2004/12/02 17:32

푸른 눈 먹물 옷 입은 제자 탄생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7



- 쪽지 적어준 공안 3천장 이르고 -

낯선 미국인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미국인의 입장에서나 가르치는 행원스님의 입장에서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르치는 쪽에서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배우는 쪽에서는 그 생소한 수행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파트 법당의 수좌들은 열심이었다. 눈빛과 눈빛으로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를 알아채는 정도까지 다다르고부터는 생활 자체에 하나의 질서가 부여될 수 있었다.

행원스님이 단어를 써 놓으면 제자들은 그 단어들을 꿰어 맞춰서 법문으로 만들곤했다. 그런 단어와 단어들을 통한 의사소통은 다름아닌 공안이되고 있었다. 참선에서의 화두란 식사를 하는데 있어 숟가락이나 포크가 하는 역할을 해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미국의 수좌들. 그들에게 쪽지에 적어 준 스님의 공안은 그날의 수행과제이기도 했던 것인데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 3천장에 이르렀다.

이제 미국생활에 대한 요령이 생기고 벽안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삶에 수행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키고 있을 무렵 재미 홍법원을 세웠다. 72년 9월의 일이었는데 그해에는 뉴욕에 삼보사도 세워졌다.

삼보사는 당시의 정달스님이 세운 것이었고 73년 1월에는 구산스님이 삼보사와 홍법원을 다녀갔다. 또 혜정스님도 미국의 법당을 다녀 갔고 계정스님도 미국으로 바랑을 지고 왔다. 계정스님은 행원스님의 초청을 받아 왔는데 도착즉시 달마사를 개원해 포교에 들어갔다.

정달스님도 행원스님처럼 일을해야만 했다. 신발공장을 다니며 돈을 벌지 않으면 않됐던 것이다. 미국땅은 절대로 공짜가 없는 곳이었고 이방인에게 정신의 지도자로 자리잡기에는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 우선적이었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제자들은 언제나처럼 낮에 일하고 저녁에 참선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참선을 하고는 일터로 나갔다. 참선도 잘했지만 절도 잘했다. 애당초 김정선교수가 “미국애들에게 명령을 하거나 절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던 충고는 이제 무색하게 되었다. 행원스님은 그 개인주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한국 절에서 소임을 나누듯이 한가지씩 소임을 맡겨 그 일에 대해서 만큼은 책임을 지게 했던 것이다. 시키는 것에 대한 복종은 잘 안해도 자기의 소임에 대한 책임감은 무서우리만치 철저한 것이 미국인들이었다.

아무튼 스님은 미국의 제자들과 또 하나의 도전을 했다. 그것은 돈모으기 원력이었다. 여름 어느날의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자, 이제 너희 10명과 나를 합해서 열한명은 3개월간 열심히 일을 해서 1인당 천불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11명의 식구는 더 배고프고 더 알뜰하게 살아내야 했지만 석달 후에는 1만1천불이 생기게 됐다.

그 돈으로 산 것이 홍법원 4층집이었던 것이다. 뉴욕에 홍법원을 세운 것은 스님 개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한국불교가 정식으로 미국에 전법의 물줄기를 댄 것이기도 했다.

홍법원을 근거지로 해서 미국포교는 거듭거듭 발전해 나갔다. 스티븐이라는 제자는 무각(無覺)이라는 법명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보스톤에 선방을 열어 잘 운영했다. 그곳에 행원스님은 진경, 법안스님등을 초청하기도 했다.

뉴헤븐에 낸 선방에는 예일대학의 학생들이 많이 왔고 데이브, 스티브, 바브 등 교수들이 중심이되어 선방을 이끌었다.

각지에 선원이 생겨나면서부터 행원스님은 제자들을 보다 조직적으로 공부시키고 그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심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선원마다 선원장과 입승, 원주, 교무 등의 소임자를 정했다. 그들을 하나씩의 소임으로 스스로 할 일을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부의 깊이를 재는 일이었다.

처음 입문해서 3~4개월은 기초교리를 가르치며 불자가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된다. 두어차례 용맹정진을 시킴으로 그의 인내력과 불교에 대한 열의를 체크하기도 했다. 그 단계가 지나면 5계를 설하고 다시 1년이상 선공부를 시킨다. 행원스님이 만든 ‘선의 나침판’이란 공안집을 막힘없이 훑으면 일단 식견의 물꼬가 튼 것으로 여길 수 있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 시험을 넘어서면 법사로 불렀다. 법사를 명명받고도 5년가량 더 공부해 천칠백 공안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정도가 되면 지도법사 자격을 주었다. 그래서 선원을 맡기고 신자들을 지도하게 했던 것이다.

출가에 대한 간절함이 깃든 사람은 출가수행도 가능케 했으므로 푸른 눈에 먹물옷을 걸친 제자도 생기게 됐다.

아무튼 행원스님의 미국포교는 여여하게 흐르는 물처럼 시간을 따라 마당도 넓어지고 결실 거두게 되었다.
2004/12/02 17:32 2004/12/02 17:32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6

- 시주없어 세탁소취직…신도 점차 늘어-
- 좁은 아파트 합숙하며 참선 지도 -

미국행 비행기에서 만났던 김정선 교수를 다시 만난 것은 보스톤에서 1시간가량 차를 달린 후였다. 그곳의 학생 너 댓명이 미리 교수의 집에 와 있는 것을 보고 행원스님은 놀랐다.
“스님, 반갑습니다. 스님이 오신다니까 이렇게 학생들까지 찾아 왔군요. 다들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김교수가 이렇게 인사를 하고 스님과 학생들사이에도 간단히 인사가 치뤄졌다. 그리고는 스님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야기를 나눴다기 보다는 “불교가 무엇인지 얘기해 주십시오”라는 교수의 청에 대해 행원스님이 법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판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행원스님이 ‘선이란 무엇이냐’ ‘불립문자요 직지인심이란 말은 무슨 의미냐’를 이야기 하면 그 통역을 김교수가 하는데 의미가 바르게 전달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언어도단’과 ‘불립문자’의 뜻을 서로 다른 언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되지 못할 일이기도 했다. 불교를 가르치는 이야기판은 깨졌지만 학생들은 스님과 좀더 오래 만나며 조금씩 배우고 싶다고 청했다. 이미 미국포교에 뜻을 세운 뒤인데 무엇을 망설일 것인가.

행원스님은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얻었다. 그리고는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참선을 지도했다. 역시 말이 안통하는게 큰 어려움이었다. 스님이 아무말 없이 방석을 깔고 가부좌를 틀면 학생들도 그것을 따라했다. 죽비 소리에 맞춰 앉고 또 일어서 움직이는 것으로 참선을 지도하는데는 아무래도 답답한 그 무엇이 있었다.

왜 그렇게 앉고 앉아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설법을 해야 했다. 빈 깡통에 흙을 퍼 넣더라도 그 이유와 방법이 있을 것인데 그 열의에 찬 학생들을 그저 멍청히 앉아 있게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편법이긴 했지만 최면술을 조금씩 써가며 학생들에게 단전호흡법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간단한 말로 선(禪)의 목적 등을 설명했다. 통역하는 김교수도 무척 힘들었겠지만 내색은 않고 늘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시 흑인촌으로 아파트를 옮겼는데 참선을 배우러 찾아오는 신자가 30여명이나 됐다. 그곳에 브라운대학의 프르덴 교수가 찾아 왔는데 그는 일본말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동경대학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하바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스님에게 참선을 배우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 온 것이었다.

프르덴 교수가 일본말에 능했던 것이 스님에게만 반가운 일일 수 없었다. 30여명의 학생들에게도 해당되는 반가움이었다. 이제 학생들은 어렵지 않게 스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스님이 일본말로 뭔가를 얘기하면 프르덴교수는 담박에 그것을 영어로 옮겨 듣는 이의 귀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매주 아파트가 메어지도록 사람들이 몰려왔다. 50명, 60명, 90명… 이렇게 참가자가 많은 법회를 열어 나가다 보니 살림살이가 궁핍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보시나 시주가 무엇인지 알 미국신도는 없었고 그것을 강요할 형편도 못 되었다. 할 수 없이 행원스님은 세탁소에 일자리를 얻었다. 영주권이 없다는 이유로 한달 품삯도 2백50불 이상을 받지 못했다. 영주권 있는 사람의 6백~7백불에 비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월급이었지만 달리 항변할 문도 벽도 없었다.

반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지나 갔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매일 찾아 오는 사람에게 참선을 가르치고 금요일 밤에는 정기법회를 가지며 지내는 동안 아예 스님의 법당에 들어 와 살겠다는 사람도 한 두 사람씩 생겼다.

“마음 자리를 하나로 하려는데 같이 못 살 것도 없지. 들어와 살도록 해요.”스님과 그들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함께 예불하고 참선하고 그렇게 단체생활을 했던 것이다. 입이 많다보니 먹거리의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밥에 두부와 김치와 물을 넣고 끓여 주어도 그들은 맛나게 먹었다.

“스님, 오늘은 저희가 식사를 짓겠습니다.”
“그래 보시오.”
그들은 빵이니 우유등속을 장만하고 쌀을 구해다 밥을 짓기도 했는데 제법 밥이 잘 되었다. 함께 살면서 간단한 말과 몸짓의 의사 소통만 가능해 진 것이 아니라 밥짓는 일까지 배우게 된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잘된 밥을 그릇에 퍼담은 한 제자가 다시 물을 붓더니 끓여서 내왔다.

“아니 밥 잘 지어서 이게 뭐야.”
의아해 하는 스님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전에 스님이 이렇게 끓는 물을 부어 드셨잖아요.”
“하하하, 그것은 찬밥이어서 그렇게 먹은 것이지….”

임연태 기자
2004/12/02 17:30 2004/12/02 17:30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5



미국 대륙을 뒤덮은 히피사상이 순수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관습으로 정착되는 가운데 자연적인 생활만 낳은 것은 아니었다. 나체촌에서 환각제 복용, 노동기피등 향락추구로 방향을 뒤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정표 없는 사상운동은 필수적으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맹목적인 삶의 습관을 낳고 있었는데 그때 미국에 들어온 것이 인도의 요가였다. 그 요가는 현실도피와 향락추구의 삶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행원스님은 미국에 첫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요가란 것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이 지극히 옳은 것인지, 그러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를 극명하게 심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히피사회에 또 하나의 바람으로 불고 있었다는 것이 행원스님의 느낌이었다.

뚜렷한 목적이 없는 것은 미국인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다. 미국에는 다시 선(禪)이라는 불교의 수행법이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선이란 것은 지극히 일본식입니다.”
이 말을 들은 행원스님은 이미 미국에 일본의 승려들이 들어 와 선방을 열고 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선에 관심있는 계층은 20~30대였다. 그러니까 미국의 방황하는 지성들은 인간본성의 의미를 찾는 일, 바로 깨달음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히피에서 요가로 다시 요가에서 선으로 관심의 방향타를 옮기고 있는 그들은 일본승려에게 선을 지도 받고 일본 서적을 통해 선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LA에만해도 ‘마이즈니로시’ ‘사사끼로시’ ‘라차스드레고’ ‘갑블로시’ 등이 선사대접을 받고 있었다. 로시란 선사(禪師)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선덕화 보살의 집에서 행원스님은 미국의 사정을 대충 얘기듣고 이곳에 한국 선이 자리잡지 않으면 끝내 요가와 일본선만이 불교인 것으로 오해될 것이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만난 김교수가 생각났다.

“그 교수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군.”
스님은 혼자 중얼거리며 선덕화 보살의 집 2층 방에 일본에서 모셔간 부처님을 모셨다. 며칠이 지나자 주변의 교민들이 서너명 찾아와 부처님께 절을 하고 스님을 반겼다. 그리고 ‘절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석달정도 여행하러 온 사람일 뿐입니다.”
스님은 아직 선뜻 절을 세운다는 말을 하기가 이르다고 생각했다.

스님의 생각과는 달리 선덕화 보살의 이웃들은 꾸준히 부처님을 찾아왔고 그러다보니 그 작은 방은 법당이 되고 말았다.

행원스님은 선덕화 보살집에 거처를 둔 채 LA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LA라는 한 도시만 보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스님은 나름대로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많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느날 스님은 필라델피아에 한국 스님이 절을 짓고 포교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왔다. 그 스님은 서경보스님이고 절은 능인선원이라고했다.

“그 절에 한번 가보고 싶군요.”
LA의 이곳저곳을 둘러 본 스님은 시카고를 거쳐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는 다행히 아는 사람이 몇 있었다. 구영회, 유영수, 이계향씨가 그들이었는데, 그들도 스님을 보자바자 “미곳에 절을 만들자”며 서두르기 시작했다. 스님을 앞세워 아파트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스님은 미국에 절을 세운다는 생각을 굳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계향씨의 동생과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대령출신으로 음악과 조각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골동품상이었다. 그는 일본승려인 에이도와 친한 사이라고 했다.

“그 에이도 스님은 이곳에서 선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선방을 운영한다는 소리에 행원스님은 귀가 번쩍 열렸다. 그래서 그 선방에도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방에는 50여명의 미국인과 한국인 일본인이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일본 스님이 이렇게 선방을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야.”
스님은 생각을 바꾸었다. 미국이라는 불교의 황무지에 한국 불교의 선이 자라나지 않으면 끝내 일본불교와 인도의 요가등이 이곳에서 불교의 전부인양 행세를 할 것이 뻔했고 그 생각이 들자 아찔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절을 세우고 선방을 열어야 겠다.”
행원스님은 보스톤으로 발길을 돌렸다. 민순기라는 신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스님 반갑습니다.”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인사가 오가고 스님은 이미 결정된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 선방을 열고 싶소. 절을 세우겠다는 것이지요. 교민들도 원하고 내가 먹물옷을 입고 여기까지 와서 꼭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든 마음의 결단이 어려운 것이지 한 마음을 결정하면 나머지 일이란 일사천리로 풀려 나가게 마련이다. 행원스님도 미국 포교에 대한 발원을 하고 보니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았다. 스님은 재차 다짐했다.

“미국에 한국불교의 선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리라.”
2004/12/02 17:29 2004/12/02 17:29

황무지 같은 교민촌 LA에 첫발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4



- 히피사상 물든 美 젊은이들 목격 -

그 로드아이랜드 주립대학의 교수는 김정선이라는 사람이었다.
“제가 불교를 오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김교수는 대학 교수답게 차근차근 질문해 왔다. 행원스님은 그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다 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간략히 말했다.

“불교 그 자체는 오해할 것도 없고 이해할 것도 없지요. 불교는 그저 불교일 뿐입니다. 다만 김교수께서는 한국불교를 모르고 일본불교만 공부했다고 하니 그것이 오해의 소지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김교수는 매우 진지했다. 스님은 말을 이었다.

“일본불교는 한국에서 전해져 간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변화된 불교의 수행과 신행의 모습들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지요. 더구나 그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자생되기도 하고 변모되기도 한 사상적인 차이점도 매우 상세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십니까.”
“어허, 이 양반이 교수님이시라더니… 다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불교는 지식의 학문체계로 봐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렇게 알음알이에 얽매이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 그것 또한 오해의 불씨입니다.”
비행기가 기류를 타고 흔들리고 있었다. 스님은 이 교수에게 어디서 어디까지를 얘기해야 할 것인지 잠시 생각을 했다.

“이봐요 김교수. 이 책을 보시오. 나는 선승(禪僧)이고 이것은 <선학강좌>라는 책인데 내가 써본 것이오.”
그는 책을 받아 들더니 더욱 진지한 눈빛이 됐다. 그리고 첫장부터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 책에 불교의 전통이 쭉 서 있을 것이오. 또 그것이 한국불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니 가져다 보시지요.”
“고맙습니다. 가능하면 제가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해 보고 싶군요. 미국 학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려면 이런 책이 필요하거든요.”
“불가능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당신은 교수이니 잘 해 낼 것이요…”비행기가 내릴 때까지 그 교수는 책을 덮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짐을 챙기며 자기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네 주더니 “꼭 다시 뵙고 싶다”고 말했다.

“인연이 있을 것이오.”
로스엔젤레스.

1972년의 LA는 황량했다. 미국내의 사정도 황량했지만 교민들의 삶도 황무지와 같았다. 그 황량한 도시에 첫발을 디딘 한국 승려를 맞이한 사람은 선덕화보살이었다. 그녀는 일본 교또의 김은자 보살 동생이었는데 착하고 불심이 강했다.

“스님, 긴 시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님이 오시니까 괜히 저희들이 든든해지는 것 같아요.”
선덕화 보살이 자기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했던 그 ‘든든해지는 것 같다’는 말이 행원스님에게는 하나의 짐이 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랬듯이 이곳의 많은 교민들도 스님을 의지해 불교를 믿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행원스님이 미국에 처음 도착한 72년에는 미국 젊은이들의 마음에 큰 바람이 불고 있는 때였다. ‘미국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떤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스님의 LA행 비행기에서의 마음이었다.

때문에 스님은 미국 젊은이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 관심은 곧 당시의 ‘큰 바람’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큰 바람’이란 다름 아닌 반전운동과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감이었다. 65년부터 시작된 월남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70년을 넘기며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며 전장에 무기를 팔고 군대를 투입시키는 기성세대를 불신했다. 뿐만아니라 기성세대의 정치와 문화와 교육과 종교, 예술들을 모조리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부정적 시각은 ‘대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것이 바로 히피사상이었다.

대자연은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높고 낮음에 대해서도 좋고 나쁨에 대해서도 구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파도치고 있었다. 그 뜨거운 파도는 순수했다. 그 순수를 표현하는 히피사상은 급속도로 미국을 뒤덮고 있었다. 히피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매우 영리한 신의 이름이다. 그 신은 대자연과 인간 사회를 바르게 연관시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 히피사상가들의 논리였다.
2004/12/02 17:29 2004/12/02 17:29

“사람사는 곳 어디나 전법 현장”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3



-홍콩홍법원 세우고 다시 미국행 -

68년부터 홍콩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절을 짖는 것이 아니라 법(法)의 자리를 짓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행원스님은 일본에서의 포교활동으로 해외 포교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전법의 길이 있다.”
행원스님은 세상 어디든지 인간의 삶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이 머무는 곳이란 확신을 갖고 홍콩에 새로운 전법의 터를 닦게 된 것이다. 이미 홍콩에 머물고 있던 세진스님과 성회스님 등이 많은 도움을 줬다.

홍콩 홍법원 설립은 2년이란 시간이 걸려야 했다. 행원스님이 홍콩 현지에 줄곳 머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님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여러 행사를 주관하고 또 대규모 법회에 참석해야 했다. 현지의 스님들과 제자들의 도움으로 2년만에 문을 열게 된 홍콩 홍법원은 청하스님(현, 통도사부방장)에게 일임했다. 청하스님은 찾아 드는 신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며 신도를 확보해 나갔다.

홍콩에 홍법원을 세우는 일로 분주한 가운데 행원스님은 다시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동경에서 만난 사업가 유영수씨가 “스님, 미국에 가십시다. 미국에서도 포교해야 하십니다”라며 사뭇 매달렸던 것이다.

“미국에 갈 생각이 없지 않아요. 그러나 아직 일본과 홍콩이 정리되지 않아서 힘들겠어요…”
행원스님이 이렇게 미국행을 피일차일 미룬 것은 유영수씨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던지 72년 봄에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초청장과 비행기표가 동봉돼 있었다.

“그래 가자. 구경삼아 가서 석달쯤 있다가 돌아 오지 뭐.”
행원스님은 동경에서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타며 석달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차피 미국으로 가게 된 바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곳의 문화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 보자’고 다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행기는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행원스님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는 긴머리를 한 남자였는데 일본사람 같기도 하고 한국인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차림새는 미국인에 가까왔다. 스님이 그에게 신경이 쓰인 것이 그의 외모때문은 아니었다. 비행기에 올라 앉는 순간부터 그는 어떤 말을 하고 싶다는 듯이 힐끗힐끗 스님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지났다. 그는 무슨 결심을 했다는 듯 스님에게 인사를 청해 왔다.

“스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삭발염의가 말이나 되겠소.”
“아, 네. 그렇군요.”
행원스님은 저으기 놀라운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는 한국인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내는 매우 엉성한 한국말이었고 그것도 경상도 억양이 강했다.

“경상도 말투이신데 한국인이십니까.”
“예…”
“어디에 사시는지.”
“미국에 삽니다.”
스님은 스스로가 그에게서 어떤 정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다녀 오십니까.”
“예, 스님. 저는 미국 보스톤 아래쪽의 로드아이랜드 주립대학 교수입니다.”
“아, 교수님이시군요.”
“동양역사 교수인데 공부를 하다보니 불교에 관한 것이 많이 나오고 미국에서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일본에 와서 석달을 머물며 공부를 하고 가는 길입니다.”
그 사내가 힐끔힐끔 스님을 쳐다보며 무엇인가 말을 건네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조금전의 스님의 느낌은 이쯤에서 틀린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래요. 어디서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
“일본 대학들을 다니며 동양불교를 배웠습니다.”
행원스님은 이 사내가 배운 불교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허, 교수님은 불교를 배운 것이 아니고 불교를 오해하고 가시는 군요.”교수의 눈이 갑자기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04/12/02 17:28 2004/12/02 17:28

일 여신도 시주로 ...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 2



- 일 여신도 시주로 셋방법당 청산 홍법원 개설 -
- “조총련과 손잡았다”모함 남산의 조사 받기도 -

“행원스님 계세요”
“누구시요”
“저, 고바야시예요”
고바야시 보살은 행원스님을 찾아와 한국의 참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참선을 배우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행원 스님의 일본 포교에 큰 도움을 주게 됐다. 그녀는 스스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을 행원스님과 인연 지어주는데 적극적이었다.

어느날 고바야시보살이 두 명의 교포 여인을 데리고 왔다. 나까노상과 노야마상이 그들인데 그 두 한국 교포는 일본에서 한국 신도가 모이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이니 법회도 잘됐다. 참선이란 무엇인가. 왜 하는 것인가. 무엇을 구하는 것인가. 주로 참선과 관련한 주제로 법회를 이끌었다.

“스님, 이제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신도들이 먼저 제의한 것이 큰 절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직 경제력이 닿지 않으니 좁은대로 지냅시다. 법당이 크다고 수행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사람들이 편히 앉아 참선도 하고 법문도 들으려면 큰 곳으로 옮겨야 해요. 무슨 방법이 있을 겁니다”
노야마상이 나서서 큰 절로 옮기는 일을 추진해 보겠다더니 어느날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제 남편이 3백만엔을 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좀 큰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행원스님은 신도들의 성의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집을 옮기기로 했다. 이렇게해서 새롭게 전법의 터전을 잡은 곳은 동경의 문경구 충일이란 곳이었다. 고오라깽야구장 뒤편에 제법 큰 집이 하나 비어 있었는데 1천5백만엔이나 있어야 구할 수 있었다. 노야마상의 남편이 시주한 3백만엔을 한국은행에 넣고 1천5백만엔을 융자 받아 그 집을 인수했다. 일본으로 건너와 셋방법당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홍법원(弘法院)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수리할 곳이 많았다. 2층의 그 집은 상하 70평이었고 윗층의 다다미방 6개를 다 터서 법당으로 만드는데만 75만엔이 들었다. 수리비는 나까노 보살이 냈다.

어쨌거나 새로운 법당이 마련됐다. 어수선한 일본 불교에 본격적으로 한국 불교를 전파할 수 있는 중요한 법당이 생긴 것이다.

“다 여러분들의 덕분입니다. 이제 이 법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견성(見性)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행원스님은 신도들과 기쁨을 나누며 다시금 포교 사업의 힘겨움과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홍법원에서의 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신도들의 집을 찾아가 불공을 해주지 않으면 융자금을 갚을 길이 없었다. 홍법원에서는 참선법회를 계속 열어 갔으며 신도들도 늘어났지만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여러명 찾아 왔다. 인환스님(현 동국대 교수)이나 김지견법사(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이영자씨(현 동국대 교수)등이 홍법원에 인연을 맺어 유학생활을 했다. 그들은 행원 스님에게 있어 든든한 식구들이기도 했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불교는 귀족적인 것과 화려한 의식을 좋아했다. 그런 영향때문에 행원스님의 초기 전법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홍법원을 세운 뒤로는 독자적인 법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홍법원이 안정되려 할 때쯤 행원스님은 매우 언짢은 모함을 받았다.


‘행원스님이 조총련으로부터 2천만엔을 받아서 일본에 절을 지었다’는 터무니 없는 모함이었다. 그것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정보부에 그 모함이 직접
전달된 것이다.
당시 서울의 ‘남산’이라면 무서운 곳이었다. 군사정권 아래의 중앙정보부가 ‘남산’으로 별칭되고 있었는데 그곳은 초법적인 곳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남산에서 한 사람이 찾아 왔다. 행원스님은 홍법원을 세운뒤 동경과 서울을 자주 왕복했었다.


“스님, 저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만 조사가 불가피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님에 대한 투서가 들어 왔는데요, 일본서 조총련과 손을 잡았다고…”
“나는 모르는 일이오”
“자세한 내막을 말씀해 주시지요. 스님”
“아는 것이 없으니 투서한 사람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어 보시구려”
그 직원은 결국 스님의 요구대로 투서한 사람과 그 내용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모함이오. 내게 증거가 있으니 보시겠소”
행원스님은 일본 홍법원을 사기위해 은행 융자를 얻은 영수증등을 보여주었다.


결국 ‘남산’의 직원은 “그럴줄 알았어요…”라며 돌아가고 말았다.
이같은 모함이 생긴 것은 일본내에 불교를 이용해 발판을 세우려는 재가자들의 장난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실패했다. 일본에 가서 투서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행원스님은 시치미를 떼고 사정 얘기를 했다.
“이런 때려 죽일놈이 있습니까. 어떤 놈이 스님을 그런 지경으로 모함했답니까…”


투서한 장본인의 흥분된 목소리가 오히려 측은하게 들렸기 때문에 행원스님은 더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본 홍법원은 계속 번창했다. 제자들은 참선을 곧잘 했으며 몸과 마음에 수행자의 티를 갖고 있었다. 각종 행사나 단체의 모임에서도 행원스님을 초청했다.


2차 대전후에 생겨난 신흥종교와 전통불교의 혼돈 속에서 한국의 선불교를 전하는 일이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4/12/02 17:28 2004/12/02 17:28

교포들 "한국불교 믿고 싶다"
다시 보는 숭산 스님 전법 이야기1



-…도쿄서 셋방법당 열고 보니… -

참으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거침이 없는 역사의 물결, 그 속에 휩쓸리는 사람의 역사는 모래톱처럼 서걱 거렸다. 일제와 해방, 전쟁과 휴전선, 독재와 부패, 부패와 4. 19, 혼돈과 정치, 정치와 5. 16….

어수선한 것은 속세의 일만도 아니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유시로 인해 정화의 깃발은 올린 불교계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 혼란의 물줄기는 끝이 없었고 끝이 없다는 것은 현실을 끝을 향해 치닫는 하나의 과정으로 묶어 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절인연은 한 시점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무름이 없는 것이 법계의 진리라면 또 다른 길로 발을 내딛는 것은 인간의 현실이었다.

“비구들이여, 모든이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둘이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행원스님은 전도선언을 외치신 부처님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혼자서 가는 길, 그 외로움을 이제 스님의 현실로 받아 들이기 위해서.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 됐다. 더이상 일본은 갈 수 없는 나라, 가서는 안될 나라도 아니었다. 반대의 외침도 36년의 뼈저리는 역사는 물밑에서 서걱이는 모래톱으로 남아 있어야했다. 이 또한 어수선한 시절인연의 한 과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행원스님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것은 해외전법의 첫 결심이기도 했다. 스님의 일본행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 싹이 텄다. 초동에 있는 동국대의 기숙사 지하실이었다. 이 기숙사는 본래 일본 서본원사의 별원이었다. 종단일을 맡았던 스님은 이 별원을 허물고 새집을 지으려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어이없게도 그 지하실에서 4천여구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일본군의 뼈무덤이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어쩌기는. 원수의 유골인데 파묻어 버리든지 어디 바닷물에 던져버리지…”
놀라움과 새로이 솟아나는 분개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 아니야.”
스님은 달마회를 이끄는 몇 사람과 의논해 그 유해들을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화계사로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 그 일은 금방 소문이 났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에서 실종된 가족을 찾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간 가족의 생사를 몸서리치며 궁굼해 하듯.

소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에서 장관급 인사들까지 화계사로 몰려 왔고 가족의 유해를 부둥켜 안고 울기도 했다. 그 유해 발견은 국교 정상화에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일본은 정식으로 스님들과 정치인을 보내 유골을 인수해 갔으며 한국에서도 일본에 흩어진 동포의 유해를 찾아 왔다. 그러니까 양국간의 유해교환이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점을 지우듯 이뤄진 것이었다. 물론 이 행사에 행원스님은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 1966년의 일이었다.


이때쯤 행원스님에게 편지가 왔다. 한번도 아니고 수차례 날아든 그 편지는 일본의 국회의원 오요다시 요시오의 것이었다.
‘스님, 일본으로 와 주십시오. 일본에서는 스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입니다. 이곳의 한국인들은 한국의 절을 원하고 한국의 불교를 원합니다’
당시 일본에도 한국인 스님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일본식 스님이 되어 일본식 불교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반쯤 무당이 된 경우도 있었다.


행원스님의 일본행은 요오다시 요시오만의 채근이 아니었다. 한국의 정부에서도 일본에 갈 것을 권유했다.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동경에 평화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은 북한의 것이었다. 절이 북한 것이란 점은 문제될 것이 없었는지 몰라도 정작 큰 문제는 그 평화사가 교포들을 세뇌시키고 북으로 이송시키는 거점이란 점이었다. 이것은 정부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들은 마침내 행원스님을 일본으로 가게하는 현실적 이유로 굳어졌다.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반겨준 사람은 오요다시 요시오였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거듭거듭해 오던 요시오는 “고려사를 쓰라”는 후한 인심도 내보였다. 그러나 그 고려사는 이미 몇달전에 불타 버려 휑뎅그레한 터만 남은 사찰이었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행원스님이 일본에서 포교를 한다면 2천만원을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란 명분으로 지원해 준다고 했던 정부측의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행원스님은 그 정부의 약속을 믿고 도쿄 신주꾸에서 집을 고르고 있었다. 1천8백만원이면 사찰로 쓰기에 충분한 집을 살 수 있었다. 적당한 집도 골라 두었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에 신청한 지원금은 몇달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고 결국 점찍어 뒀던 집은 한 일본인이 사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다보이주에 셋집을 얻었다. 다달이 7만엔이란 큰 돈을 주어야 했다. 궁핍의 일본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신도도 없이 홀몸으로 시작한 일본 포교에서 넘어야 할 벽은 수 없이 많았다.
2004/12/02 17:27 2004/12/02 17:27

숭산스님 마지막 인터뷰-'오늘 이땅을 살아가는 지혜'




숭산 행원 대종사.

지난 10월 13일 현대불교신문은 ‘원로 스님들에게 듣는다-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지혜'를 주제로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과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다.
오늘의 난국을 돌파할 지혜와 용기를 숭산 스님의 마지막 법문을 통해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문 :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서민들의 삶이 힘겹기만 합니다. 그러나 정치권 일부에서는 이에 아랑곳 없이 정쟁에 몰입하고 있는듯한 양상입니다. 국민들이 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요?


숭산 스님 : 화(禍)와 복(福)은 스스로 받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니 고난중에도 마음을 비우는 사람은 평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이라고 다 좋은가요.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도 있는데 복도 너무 많으면 복받느라 걱정이 많아집니다.
그러니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 제 분수를 알아 욕심을 내려놓고 쉴 것이며 내 앞에 닥친 이 일, 이 순간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 자체로서 삶은 이미 바른 길로 들어선 것이 됩니다.
내려놓고 쉬라고 해서 결코 머물러 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기 능력에 따라 그릇 크기에 맞게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문 : 현재 한국불교에는 각종의 수행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어떤 수행법은 며칠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며 불자들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수행법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수행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또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요?

숭산 스님 : 선(禪)을 닦는데도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규봉종밀 선사의 말을 빌면 선에도 외도선이니 범부선이니 소승선이니 하는게 있고, 중도실상을 관하는 대승선, 최상승선인 여래청정선 등이 있습니다. 또 불교공부를 하는 과정으로 보면 간경문에 염불문 그리고 진언문도 있고 참선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밭을 가는데도 호미로 쟁기로 또는 소를 끌어 가는 등 여러 방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모두 방편이 되기에 문제삼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니 외도선이 아닌 다음에야 '이거다' 라고 한가지로 고집할 수는 없지만 이왕에 대자유인이 되어 걸림없이 살아가고자 한다면 최상승의 참선문을 통해 마음을 깨닫도록 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세상이 점점 영악해지다 보니 수행도 깨달음도 뭔가 요령껏, 남보다 빠른 지름길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또 그런 것을 좋아하는게 요즘의 세태인 모양이나 깨달음엔 지름길도 없고 특별한 요령도 없습니다.
그저 가고 오고 앉고 눕고 간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마음자리를 살펴나가면 됩니다.

문 : 한국불교 일각에서는 계율을 안 지키는 풍토가 한국불교를 병들게 하는 주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일각에서는 시대에 맞는 계율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숭산 스님 :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만 옛날에 백낙천(白樂天)이 조과(鳥 ) 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조과 선사의 대답이 간단합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한 일 많이 하고 그 마음을 깨끗이 쓰면 그것이 불법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足諸佛敎)."
그러자 백낙천이 껄걸 웃으면서 "그쯤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나 백낙천이 뭘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것입니다.
불교는 이치를 아는데 있는게 아니라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만약 계율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시대에 맞느니 안 맞느니 하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런 말하기에 앞서 조과 선사가 대답한 뜻부터 바로 알라고 일러주고 싶습니다.
다만 5계, 10계 라도 목숨 걸고 실천부터 하는게 신불자(信佛者)의 도리입니다. 계율의 개정을 말하는 이들은 돌이켜 그 말을 하는 마음자리부터 살필 일입니다."


문 : 저 멀리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최근 이라크 전쟁까지 종교가 전쟁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루고 종교화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숭산 스님 :네 신, 내 신…. 신의 이름을 앞세워 싸움을 벌이는 성향이 없질 않으니 그래서 '종교를 아편'이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먼저 사람의 도리를 알고 땅의 도리를 알고나서야 하늘 길을 묻는게 순서이겠거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서 그만 인간의 길은 제쳐두고 서로들 하늘 일을 잘 안다고 나대니 전쟁이 날 수 밖에 없지요.
기독교의 하나님이란 분은 텅 비고 깨끗한 자리라 그속에서 삼라만상이 탄생했다는 의미이니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어굿나지 않습니다. 유교다 도교다 하는 가르침도 다 마음을 잘 지키고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니 불교와도 또 어긋나지 않거늘 어디 다투고 싸울 명분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으면 그야말로 세계가 한 꽃송이 이거늘 그걸 모르니 편가르고 싸우는 것입니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2004/12/02 17:27 2004/12/02 17:27

걱정마라, 만고광명이 청산유수니라

[한겨레 조연현 기자 2004-11-30 23:30]


“큰스님, 스님이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 걱정 마라. 만고광명이 청산유수니라.” 30일 오후 5시15분. 선불교의 큰 별 숭산 스님은 화계사의 주지 성광 스님과 국제선원장 현각 스님 등 수십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자의 물음에 이렇듯 한마디만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제자의 ‘애타는 심정’마저 선사의 심검으로 베어버렸다. 숭산 스님은 ‘왜 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라고 분명히 했다.
“모두 놓아 버려라. 그 다음엔 우리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행할 뿐.” 평소 그의 이런 설법은 생사의 경계에서도 일관됐다. ‘오직 할 뿐’이었다.

일제 식민시대에 태어난 스님은 어릴 시절부터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이였다. 17살 때 독립운동에 가담해 일본 헌병대에 체포, 수감돼 감방에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숭산 스님은 1946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정치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보고 4대 독자의 몸으로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47년 10월이었다.

그는 깊은 암자에 들어가 불교 기도문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며 백일기도를 해 힘을 얻은 뒤 경허-만공 스님으로부터 이어온 법맥을 이어받은 고봉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참선을 시작했다.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동안거(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승려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수행에 힘쓰는 일)를 마친 그는 누더기를 걸친 채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고봉 스님을 찾아가 법거량(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 끝에 깨달음의 징표인 법인가를 받았다. 22살의 새파란 나이였다. 60년 세랍 33살에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을 지낸 스님은 66년 일본에 홍법원을 세워 외국 포교를 떠나며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는 한국 불교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던 서양에 한국의 선을 알려 69년부터 미국, 캐나다, 브라질, 프랑스에 선원을 지어 선풍을 드날렸다.

“유 애스크, 아 앤서. 디스 이스 러브.”(네가 묻는데, 내가 대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강연에서 한 학생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늦은 나이에 영어를 익혀 오직 간결하고 선적이었던 그의 문답은 복잡한 지식에 식상한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동양의 선불교에 무지한 서양인들을 위해 일본 선 방식으로 공안(화두)을 하나하나 타파해 나가도록 지도했다.

돈오점수를 인정하지 않는 국내 전통 선가에서는 단계적인 깨달음으로 이끄는 그의 이런 지도 방식 때문에 “일본 선의 아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화계사 국제선원장인 현각 스님, <왜 사느냐>의 저자인 미국 캘리포니아 태고사 주지 무량 스님 등 수많은 외국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재에선 티베트의 정신지도자 달라이라마, 베트남 출신 프랑스 플럼빌리지의 틱낫한 스님, 캄보디아의 종정 마하 고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늘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달리 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라”고 가르쳤다. 화계사 (02)902-2663.
2004/12/01 17:26 2004/12/01 17:26

[종교]숭산 큰 스님을 추모하며


숭산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15년 전인 198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미국 하버드대 샌더스 시어터(Sanders Theater·하버드대에서 가장 큰 강의실)에서였다.


강의실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강사의 얼굴을 보고 실망했다. 통통하고 키 작은 동양인이 삭발한 머리에 낡은 회색 옷을 걸치고 문법도 잘 맞지 않는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무슨 생불(生佛)이라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강의에 빨려 들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스님은 내가 그동안 어떤 책에서도, 어떤 교수님으로부터도 접하지 못했던 간단명료하고 생생한 지혜들을 쏟아냈다.


나는 당시 불교에서 진리를 구하고 있었는데 숭산 스님의 강의는 내 운명을 180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물설고 낯선 땅에서 승려가 되어 한국불교를 포교하고 있으니 말이다.


큰스님은 1, 2년 전부터 편찮으셨다. 입적하시기 며칠 전에도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지난달 30일 오후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들 말에 부랴부랴 병원에서 화계사로 모셨다. 큰스님의 미국인 첫 제자 대봉 스님(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조실)과 내가 앰뷸런스에 함께 탔다.


큰스님의 얼굴은 너무 평온했다. 피부는 아기처럼 고와 주변에 빛을 뿌릴 정도였다. 고른 숨을 내쉬는 스님의 이마에 정중하게 키스했다. 내 입술에 닿는 스님의 피부가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천사의 것 같았다. 맘속 깊이 스승께 보내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이날 오후 4시 화계사. 주지 스님을 비롯해 가까운 제자들이 함께 모였다. 대광(미국 프로비던스 선원장), 오광(유고슬라비아 스님), 현문(폴란드 스님)과 한국 스님들까지 모두 8명이 무릎 꿇고 둘러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큰스님의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몸에 의지하지 말라. 우리 모두 모르는 곳에서 왔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오직 모를 뿐이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긴 잠을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큰스님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희생으로 푸른 눈의 우리들을 가르치느라 건강도 챙기시지 못했다.


이제 한국의 정신문화는 숭산 큰스님이라는 용광로에 녹아 미국에서, 세계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위대한 가르침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알리는 일만이 큰스님께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와 정신에 눈뜨게 해 준, 나의 또 다른 아버지나 다름없는 큰스님의 극락왕생을 빈다.




현각 스님·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장
2004/12/01 17:25 2004/12/01 17:25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5

"원인없는 결과 없어 내 책임 다할때 삶 환해져"
"모양 이름 집착하고 살면 내 본래 마음 몰라요"



숭산 스님.

이 지구가 돌고있는 한 하나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살아나가느냐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첫째 나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잘 가지며 내 가정을 어떻게 잘 지키며 또 내 나라는 어떻게 육성시키며 모든 인류가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나라를 볼 때에 여성이라는 그 힘이 올바른 정도를 잡을 때에 그 나라가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여성이 타락되면 인간성이 상실되고 나라가 망해갔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뒤돌아보면 왕실 안에서 흐름을 조정한 것이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방향을 바꾼 것도 여성이었으며 또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져오게 한 것도 여자입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힘이라는 것이 밖에 나타나는 힘보다도 안에서 조정하는 힘이라는 것이 굉장하다는 것이 역사상에 나타난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해야만 되겠는가. 또 이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그 가운데 우리는 주부로서 어떻게 나 자신을 콘트롤하고 가정을 리드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이 세계의 흐름을 보면 격동기입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두 개의 진영으로 벌어졌습니다. 공산국가가 탄생된 것이 1617년입니다. 그 무렵 독재가 심했습니다. 인간들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그 사회가 어떠한 주권자들에 의해서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유다, 평등이다 하는 것을 부르짖으며 1917년도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백년도 못가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서독이 서로 손을 맞잡고 통일을 이루었는가 하면 소련과 중공의 개방정책을 비롯하여 공산국가가 자멸하기 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소련에 종교인으로서 참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소련정부가 세계에 있는 모든 종교인과 정치가·학자·예술인 등 각계 분야에 있는 3백명을 초청했습니다. 그 다음 소련내에 있는 각계각층 사람들, 특히 현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초대했습니다. 또 소련 내에 있는 권력을 가진 3백명과 같이 일주일 동안 이 지구상에 사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한 방향을 향해서 갈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요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환경과 인간의 방향’이었습니다.

기원전 1900년 전에 그때 우리 인구가 1억도 못되었습니다. 그것이 1750년도 그러니까 1700년 동안 10억이라는 인간이 태어났었습니다.

해방되던 1945년도에 20억이라는 인구가 불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많은 인구가 얼마인가. 50억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많은 인구가 어디서 왔느냐. 이 많은 인구를 하나님이 만든 것이냐. 부처님이 만든 것이냐. 근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가 팽창한다 할 것 같으면 2000년대에 가서는 80억이 된다고 합니다. 지금은 50억인데 80억으로 늘어나면 인간은 설 땅이 없습니다. 인간폭발이 됩니다. 소련내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 150명과 미·영국 고등학교 학생 150명 등 300명을 참여시켰습니다. 그때 고르바쵸프가 말하기를, “우리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서 제일 악질적인 동물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해치고 공기와 물을 더럽게 만들고 이 세상에 모든 악행을 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먹고, 모자를 해쓰고, 가죽옷을 입고, 신발을 쓰고 다닌다 라는 말입니다. 모든 동물의 것을 다 착취해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 동물이 얼마나 인간보다 착합니까. 인간이 이 지구상에선 독재자입니다. 이 독재적인 인간은 얼마 안가서 멸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사상이니 하는 것은 철폐를 하고 인간이 어떻게 해서 환경정리를 올바로 만들었으며 우리 인간이 어떤 방향으로 올바로 나아갈 것이며 또한 다음 세대에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라고 고르바쵸프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아이 많이 낳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무엇이냐면 지금 세대가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낳는 자식들한테 돈·권력·투쟁을 물려줄 것인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우리의 자손들에게 물려줄 것입니까. 돈·권력·투쟁 어떤 것을 물려주는 것이 좋은지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1억도 못되던 인간이 50억이라는 인구로 늘어났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많은 인구가 늘어났는가.

고르바쵸프는 현실에서 미래를 향한 것만 얘기했습니다. 강력히 우리는 인간성을 복구해야 되겠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어째서 인구가 팽창했는지 그 원인을 이야기 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불어났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얼마만큼 악질 동물인가? 이 세상은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윤회를 하게 됩니다. 닦은 대로 짓는다고 했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좋은 일을 하면 그만큼 존경을 받게 됩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떠한 일을 책임지고 행해야 될 것인가.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남편에게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도록 도와주고,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잘 시키고 그것이 나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내 위치와 내 환경과 내 수용, 이 세 가지를 분명히 할 때에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떳떳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내 책임을 다할 때에 내 갈 길이 환하게 열립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 여성답게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변화하는 격동기에 있어서 지구상에 있는 인간 폭발지경에 있는 위기의 시기에 어떻게 해야만 여성으로서 올바른 길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항상 나 자신이 무엇인가부터 찾아야 합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인가. 나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적에 어디서 왔느냐. 죽어서는 어디로 갈 것이냐. 도대체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이냐. 한번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이 지구를 창조했다는 것이 맞는 것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 일체 내 마음으로 된 것이 맞는 것인가.

또 유물론에서 물질로써 된 것이 맞는 것인가 각 종교끼리 논쟁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생각을 버리자. 생각으로써 본체를 찾고 우주의 근본을 찾는 것은 안됩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찾아 들어가는 참선을 해야 합니다. 지금 서양에서는 신부나 수녀, 목사들이 참선을 많이 하고 있습 니디.


옛날 대혜선사가 황벽선사를 찾아갔는데,

“제가 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네가 법을 배우러 와. 누가?”

“제가요.”

“이놈의 자식 어째서 송장을 끌고 다니느냐”

옛날 서암선사께서는 매일같이 “주인공아”라고 물으면 “네”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라” “네”, “언제나 남한테 속지 말아라”

“네”“주인공아”하고 “나”라는 사람이 대답을 하셨는데 어떤 것이 진짜 주인공인가?


옛날 보리달마께서 인도에서 중국에 왔습니다. 달마는 양무제를 만났습니다.

양무제는 달마대사에게 예의를 갖추고 하는 말이, “대사님, 나는 수천 절을 짓고 수많은 스님들에게 가사장삼을 비롯하여 많은 공덕을 지었는데 내 공덕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 공덕이 없소. 겨울같이 텅 빈 자리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모를 뿐입니다.”

달마대사께서 아무 미련없이 양무제 곁을 떠나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습니다. 소림사의 조그마한 굴에서 9년간 면벽참선을 했습니다.


당시 위나라에 혜가라는 국사가 있었는데, 혜가대사는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실에서 설법을 매월 행하여 오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혜가스님이 방안에서 경전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어린아이의 메아리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스님이 문을열고 살펴보니, 허공에서 오색광명이 비추면서

“네가 옳은 불법을 알고자 하면 소림굴로 찾아가라.”

“네.”

그 길로 소림굴로 찾아갔습니다. 달마가 혜가를 보고,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법을 구하러 왔느냐. 그럼 네가 나를 믿느냐?”

“네, 믿습니다.”

“믿는 표시를 해라.”

그때 혜가스님은 손을 잘랐습니다. 손이 끊어지니 혜가스님은 몹시 아파했습니다.

“스님, 법은 고사하고 내 마음이 아픕니다. 아픈 마음부터 편안하게 해주십시요.”

“그래. 그 아픈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아픈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여 살게되면 내 본래 마음을 모릅니다.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아니했을 때 내 본래 성품으로 돌아갑니다. 본 성품으로 돌아갔을 때 내가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끝으로 한가지 말씀드릴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공부를 합시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어머니와 부인, 국민이 되고 올바른 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인류의 행복을 줄 수 있는 마음의 광명을 찾게 됩니다. 열심히 여러분들이 나를 찾아서 모든 사람들한테 광명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4-11-30 오후 5:43:00
2004/11/30 16:59 2004/11/30 16:59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4

수행-포교 둘 아닌 하나 ‘깨달음 향한 길’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서울 삼청동 칠보사 조실당의 열려진 창가에서 석주스님은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노사(老師)의 독서 내용은 무엇일까.


숭산 스님.

“스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숭산스님은 석주스님께 예를 표하고 오랜만에 손을 맞잡았다.

“어서 오시오.”
“이 아이는 제 미국인 제자인데 무심이라 합니다.”
넙죽 삼배를 올리는 벽안의 젊은 선승을 석주스님은 짧지만 긴 여운의 인사로 맞았다.

“무심(無心)이라… 무심해야 공부가 되는 법이지.”
국내에서 한글경전보급과 어린이 포교에 힘써 온 석주스님과 해외를 돌며 전법의 행로를 넓혀 온 숭산스님.
두 대덕(大德)의 만남은 순탄치 못했던 현대 한국불교사를 지켜 오며 차곡차곡 쌓아 이룬 수행의 결정(結晶)을 활인(活人)의 검(劍)으로 벼르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부드럽고 온화했다. 곤궁을 양식삼아 공부에 매진하던 시절에의 회상,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사에 대한 근심과 희망을 나누는 지혜의 법석이었다. 중추가절의 넉넉함을 수미산의 한가위 달로 띄워 올리는 두 대덕의 법담은 서로의 건강을 물으며 시작됐다.

숭산:스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석주:하루 세끼 끼니 잘 챙기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책 읽고 이런저런 행사에도 나가고… 나야 이렇게 살지 뭐.

숭산:건강하신 법체를 뵈오니 기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 뵙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석주:자주 만나는 것이 대숩니까. 서로 할 일 잘하면 되는 것이지. 스님이야 한국불교를 세계에 전하는 최고의 수행을 하시는 분인데. 종종 소식은 들었어요. 참으로 장하고 훌륭하십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 포교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숭산 스님과 대담하는 석주 스님(오른쪽).

숭산:정화시절에 스님의 뒤를 이어 종무를 걱정하던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석주:그때 스님이 애를 많이 썼지요. 그런 시대적 혼란과 노력들이 오늘을 만들어낸 것 같아요.

숭산:그런데 요새는 세상이 워낙 빨리 변해서 모든게 정신 없이 돌아가요. 이런 모습이 오히려 분명한 중생계의 실상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스님께서도 젊으셨을때 여러 절을 다니시며 공부하셨는지요.

석주:나야 어려서부터 선학원에 살다가 범어사에서 나이 스물에 계를 받고 한 6년 공부하고 다시 선학원으로 와서 오래 머물렀지요. 그때 적음스님이 원장이셨는데 나는 그 스님의 일을 많이 거들었어요. 참, 숭산스님이 수덕사에서 공부를 하셨잖아요. 나도 수덕사의 정혜도량에서 밥을 한 철 먹은 적이 있어요. 만공 혜암 효봉 금봉 고봉스님들이 다 살아 계실때였어요.

숭산:저도 오래전에 그런 얘길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들어가기 조금 전의 일인 것 같군요.

석주:(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참 그 시절이 좋았지. 정말 좋은 시절이었어. 그때는 정말 공부 잘 하는 스님들이 많았거든요.

숭산:공부만 잘 했습니까. 일도 잘 했지요. 일도 공부였고 하루에 무와 잡곡으로 쑨 멀건 죽 한그릇 먹는 것도 공부였지만 말입니다. 정말 배가 많이 고팠어요. 그런 대중 생활에서는 베게도 없어서 목침 하나를 놓고 다투는 경우마저 있었습니다.

석주:그때야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죽 한 그릇이라도 줬나요. 내가 정혜사에 있을때 효봉스님이 입승을 보셨고 나는 그 스님에게 무서운 감명을 받았어요. 아, 효봉스님이 말이지, 섣달 그믐께였는데 목 아래에다가 칼을 세워 두고 혼자 정진을 하시더란 말이예요. 참 무서운 열정이셨어요.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이레를 그렇게 용맹정진 하시는데 나는 아무 말도 못했어요.

숭산:영운스님이란 분은 한 겨울에도 문을 열어 놓고 참선을 하셨잖아요. 추위를 못이기면 자기를 이길 수도 없다면서 말입니다.

석주:그랬지요. 참 공부를 열심히 하는 시절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모두 한가락씩 특기(?)가 있었어요. 그런 얘기는 스님도 다 잘 알고 있을겁니다.

숭산:알다마다요. 거 왜 혜암스님은 남의 칭찬을 잘 해서 ‘칭찬제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석주:맞아요. 혜암스님이 ‘칭찬제일’이었지요. 그 분은 무조건 남을 칭찬하며 일생을 사셨는데 고암스님도 칭찬에는 매우 후하신 분이었어요. 그 스님들은 칭찬하면 죄인도 그 죄를 뉘우친다고 했어요. 그런데 혜암스님이 절대 칭찬하지 않는 것이 있었어요. 공부를 점검할 때, 그러니까 누구하고 법담을 하다가 틀린 말이 나오면 용서를 안했어요. 한번 걸리면 두고두고 까는데 참 매서운 면모였어요. 숭산:청담스님은 ‘인욕제일’이었습니다. 참 잘 참으시는 분이었어요. 누가 뭐래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셨지요. 인욕에 큰 도가 베어 있음을 청담스님은 많이 보여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 스님은 누가 찾아가서 이러니저러니 흉을 잡고 욕을 해도 묵묵히 다 듣고 계시다가 끝에 한마디 툭 던지시는데 그게 “스님 왜 그러십니까?”였지요. 그러면 흥분해서 떠들던 사람이 오히려 부끄러워지기 일쑤였고요.
(두 대덕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석주:춘성스님은 욕을 잘하기로 일등이었잖아요. 참 욕 한번 걸팡지게 잘 했지요. 그런데 그 스님의 욕은 더러 욕이 아니라 법문 같았다니까요. 공부를 잘 하는 스님이 많은 시절엔 그렇게 재미있는 일화도 많은가 봅니다. 설봉스님이나 ‘방울스님’이라 불렸던 홍도스님도 그렇고요. 그러고 보니 우리 숭산스님도 해외전법의 제일인자가 아니십니까.


숭산:그럼 석주스님께서는 어린이 포교와 역경의 제 일인자이십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치열한 공부와 무애의 법력을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걱정이 많은데요. 스님, 사실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석주:시대가 바뀐 것 뿐이지 부처님 법이 바뀐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도 눈에 안보이게 용맹정진 하는 스님이 한둘이 아니예요. 우리가 다 가고 난 뒤에도 큰 스님들이 얼마든지 나올 겁니다.




숭산 스님.

숭산:그런데 듣기민망하게도 요새 공부하는 스님이 없다는 말들을 합니다. 세상도 그렇지만 수행환경도 많이 변했으니까요.


석주:세상이란 언제나 변하는 것이지요. 요새는 대중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도시로 나와 포교당을 운영하는 스님들도 많고 혼자 토굴을 마련해 정진하는 스님들도 많아요. 그게 다 공부하는 환경이 변하는 과정 아닙니까. 이런걸 두고 좋다 나쁘다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어디건 어떤 환경에서건 자기가 수행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부처님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다만 스스로 거스름이 없이 불법을 닦고 대중을 포교하는 일에 매진해야 겠지요. 수행과 대중교화는 따로 두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수행 가운데 포교가 있고 포교하는 가운데 수행을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숭산:그러니까 우리나라 불교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는 것 아닙니까. 참선이건 염불이건 사경이건 그것이 자기수행과 교화의 방편으로 잘 쓰여지면 되는 것입니다.


석주:우리나라 불교를 통불교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원효스님이 그랬고 성철스님도 “종단의 이름을 바꿔야 된다면 통불교라고 해야한다.”고 말했었지요. 법계의 진리를 체득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부처님 재세시나 다를 것이 없어요. 법계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바로 증득하는 공부가 된다면 방편에 끄달릴 필요는 없잖아요.


숭산:‘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배는 버려야한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우리의 공부도 강을 건너는 것이지 배를 타는 것에 목적이 있는건 아니잖습니까. 스님 우리나라는 여러 종교들이 난립해 포교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데 스님 생각에 불교의 포교는 잘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석주:외국에 나가 제일 포교를 많이 하신분이 그런 질문을 하니 뭐라 할말이 없군요. 우리나라 불교의 포교는 점차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포교승과 포교법사가 다니면서 포교하는 것만 포교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가 여러 방면으로 발전하는 것 그게 다 포교거든요. 요새 조계사 앞에만 나가봐도 얼마나 책이 많습니다. 불교책들이 수없이 나오는 것이 포교가 잘 된다는 증명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전에야 참 책도 몇권 없었어요. 용성스님이 몇가지 책을 펴내 읽혔고 한자에 음만 달아 놓은 송주들이 책으로 만들어져 읽히던 시절에 비하면 요새는 불교책의 풍년이 아닙니까. 글 모르는 사람도 없는 시대인데 이만하면 포교도 잘 된다고 봐야지요. 역경불사도 매우 잘 되고 있는데 보다 활발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역경은 경전의 의미만 한글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 가르침의 정신마저 고스란히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역경에 능한 인재를 많이 길러야 합니다. 외국의 포교는 어떻
습니까.

숭산:외국은 어렵습니다. 언어와 문자의 벽을 뛰어 넘는 것부터 서로의 습성과 사는 방법이 다른 것을 융화 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도 불법은 마음의 법이라서 조금만 마음이 열린 사람이면 쉽게 선(禪)공부에 매력을 느끼고 불법에 귀의 합니다. 여러나라에 홍법원을 세웠지만 다 마음의 공부를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석주:서울의 각황사(조계사)나 대구 보현사 강릉포교당 등이 포교를 주로하던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발전된 겁니까. 한국불교가 국내외에서 커져가고 있잖아요. ‘1면1사 운동’까지 거론되던 때도 있었잖습니까. 어린이 합창단의 경우도 그래요. 내가 칠보사에서 어린이 합창단을 할 때만 해도 반대가 많았어요. 그런건 해서 뭐하느냐는 것과 말하기 우습지만 애들이 무슨 시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시끄럽기만 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절 문 앞에다 애들을 모아 놓고 노래를 부르게 한 적도 있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요새는 거의 모든 절에 어린이 법회가 있고 합창단도 있거든요. 아예 어린이 교육시설을 운영하는 절도 늘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불교가 나름대로 잘 홍포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요즘은 개신교가 더 활발히 전도를 하는 것 같아요.


숭산:사실입니다. 불교의 포교가 잘 되려면 조직이 잘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승가는 승가대로 재가는 재가대로 일사불란한 조직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스님들 조직이 강화 되어야죠. 다시말해 법계(法階)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겁니다. 초심자나 노장님들이나 다 같이 여겨져서야 되겠습니까. 수행의 정도와 깊이에 따라 법계를 철저히 품수하고 그에 따른 기강도 확고히 세워야 합니다. 신도조직도 지금처럼 중앙에서만 몇사람이 움직이는 체계로는 안됩니다. 전국적인 규모의 탄탄한 조직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불교계의 조직이 새로이 정비되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가는 수행과 교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석주:그렇게 잘 된 조직이 운영되면 개인의 수행뿐 아니라 대중의 수행도 훨씬 잘 되겠지요. 그래야 불교도 바로 서고 좋은 세상도 빨리 오지 않겠습니까.

숭산:스님께서 성불이란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시대 중생들은 정말 성불의 큰 원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중생이나 다 그렇겠지만 성불의 서원이 절실하기는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禪)에서야 견성을 하면 거기서 다 끝난다고 하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기를 발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석주:교학적 입장에서는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는 하지 않아요. 견성을 했어도 3아승지겁을 더 닦아야 성불을 한다고 하거든요. 더 닦는다는 것은 곧 보살행인데 이 세상은 그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숭산:그렇게 해서 온 중생이 평상심을 누리게 되면 일체의 성불이 가능해 지겠지요. 평상심이란 ‘나’라는 것을 없애는 것 아닙니까. 내가 없는 곳의 모든일이 도가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평상심이 도라는 말이 나온 것인데 내가 있다고 나를 내세우니까 모든 일에 끄달려 집착을 낳고 중생계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겁니다. 우주는 그 자체가 진리인데 그 속에 살며 진리를 모르는 것도 나를 내세우는 탓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는 곳은 속세이고 속세에서는 모든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받아들여 실체를 벗어난 곳이 실상의 세계이며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실용의 세계를 펼 수 있는데 바로 이 실용의 세계를 펴는 것이 스님께서 말씀하신 보살행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수용하되 혼자하면 소승이고 대중에 회향하면 대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진리로 남을 이롭게 하면 보살의 세계가 이뤄지는 것을 모두 명심해야죠.


석주:생각이 현재를 낳고 고통을 낳는 것이니 그걸 뚝 잘라내고 진리의 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노력이 모든 불자들에게 필요합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수행에도 여러 방편이 있고 계율도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계율을 벗어나서 이룰 수 있는 도란 있을 수 없지만 그 계율에 집착을 하는 것도 바람직 스럽지 못하거든요. 계율에 집착하면 그 본래의 뜻마저 잃어버리기 쉬우니까요.


숭산:그렇습니다. 계율의 문제를 두고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지만 부처님의 말씀은 절대불변의 진리 그 자체입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걸 바꿔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기에 앞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잘 알고 공부의 바탕으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수행자가 길을 가다가 물을 만나 한 수행자가 건너편의 여자를 업어 건네 주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다른 수행자가 “자네는 계율을 어겼으니 함께 갈 수 없네”라고 하자 “자네는 아직도 그 여자를 업고 있구먼”이라 답해서 깨우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계율이라는 것도 잘못 알면 집착이 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요. 시대가 변해도 그 시대마다 불교의 자세가 오롯이 서있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석주:우리나라의 불교도 그런 면에서는 반성해야할 것이 많아요. 일제때도 육식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철저히 안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각자의 노력과 정진력에 달린 것이 계율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허용한다 안한다 하는 제도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나는 승가의 육식은 절대 안된다고 생각해요.

숭산:의제개혁을 두고 요즘 의견이 많다고 합니다. 중국의 경우 승단의 복식은 매우 정확한 구분을 가졌었지요. 아까 얘기한 법계의 구별이 옷으로 매우 엄격히 구분 되었던 것인데 우리도 우리의 전통이 있으므로 그 전통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통을 지키는 일 만큼이나 시대의 발전에 따라 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요새는 정보화 시대라서 정보교환이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따르는 것도 우리불교의 자세를 다잡는 일이겠습니다. 여기 무심스님의 경우 방에서 컴퓨터로 세계에 퍼져 있는 홍법원과 의견을 나누고 지시사항을 전하고 그쪽의 일들을 전해 듣기도 합니다. 불교계도 이런 장치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이미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석주:컴퓨터야 포교하기에 썩 좋은 것이라할 수 있지요. 앞으로는 불교의 세계화가 컴퓨터 포교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컴퓨터를 통해 뭔가를 알리려고만 해서는 안되고 그걸 통해 세계인이 뭘 요구하는가를 알아서 만족시켜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역시 컴퓨터 불교가 할 일이겠지요. 올 가을은 북한의 무장공비 때문에 매우 걱정스러운데 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지…

숭산:제가 보기에 북한은 현재 스스로 혼돈의 지경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원론적인 공상당의 입장과 군사력을 장악한 실력파 그리고 페밀리 파워의 갈등이 뒤범벅이 되어 있다는 견해입니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뿐입니다. 저렇게 군사도발을 하는 일이 어제오늘 저질러진 것도 아니고 하루이틀에 끝날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따라서 우리 정부도 보다 정확하고 폭넓은 정보체계를 갖고 항상 만약을 대비해야 합니다. 미국만을 믿고 있을 때가 아니거든요. 전국민의 대비태세가 필요합니다. 분단의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보정신이 강조 되기 전에 사회의 도덕적인 타락이 더 큰 걱정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석주:나는 그 원인을 두가지로 봐요. 잘못된 교육과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외면이 그것입니다. 학교교육이 인성을 바로하는데 치우치지 않고 출세하는 기계 만드는 쪽으로 치우친 잘못이 오늘의 사회 범죄를 만든 것입니다. 종교인들의 반성도 필요해요. 전법의 현장이 넓어 질수록 사회가 평화롭고 정의로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거든요. 뭔가 잘못 되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아까 말한대로 불교는 보살행의 종교인데 과연 오늘의 불교는 얼마나 보살행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많은 복지 시설이 운영되고 있지만 아직은 좀 부족해요. 바른 복지 사업은 시설을 운영하는데 있지 않고 ‘나’를 비우고 보살행을 하는데 있어요. 그 보살행의 현장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어야 하고요.


숭산:종단이 스님들의 특기를 살려서 그 특기대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될 겁니다. 뭘 하든 아상에 집착하지 않고 공부를 겸한 교화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스님들의 활동이 커지면 사회의 병폐도 저절로 치료가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도덕 윤리적 타락은 휴전선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나라의 평화는 타락된 평화라 생각합니다.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국민의 정서마저 외국의 좋은 것을 우리 것으로 융화해 내기 보다는 좋지 못한 풍속을 너무도 빠르게 받아 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국민적인 반성과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고 거기에 불교가 큰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석주:그렇지요. 호국불교란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것만이 아니고 국민의 바른 정신을 이끌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실현시키는데서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숭산:스님 오늘 문득 찾아 와서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석주:내가 할 말을 먼저 하시는군요.


(두 대덕은 조실당을 나와 큰법당 앞을 거닐며 잠시 가을 풍광을 쏘이고 총총히 작별의 합장을 했다.)

2004-11-30 오후 5:44:00
2004/11/30 16:58 2004/11/30 16:58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3

-“참모습 못보는데서 번뇌 시작됩니다” -
- IMF시대 거품 빼고 과욕 버려야 회생 -
-“근원캐보면‘春日鷄聲’서도 불법만나”-





온 나라가 어수선 합니다. 누구든 입만 열면 경제 얘기를 합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목표를 잘못 세웠던 탓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가다듬지 못한채 너무 거창하게 세계화라는 목표를 세웠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을 잘못 걸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미궁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이 좀 풍요로와 지니까 우리도 서구 선진국의 흉내를 내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과욕이 생겼습니다. 국민소득 1만불이라는 수치가 과욕의 도화선이 되었고 거기서 붙은 불은 소비와 향락의 잿더미를 안겨준 것입니다. 이제 참회할 때입니다.

국민소득 1만불 시대라는 수치상의 발전이 우리의 현실적인 풍요라고 믿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잘사는 나라의 뒤꽁무니만 허겁지겁 따라다니다 보니 정부가 발표하는 수치들이 국민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인양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착각을 한 국민이나 그렇게 수치를 앞세워 치세의 공을 선전한 정부 관료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이 경제대란은 누구 한사람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의 착각과 과욕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발을 땅에 두지 않고 허공에 목표를 매달아 둔채 정신없이 헤매다가 이제서야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철퇴를 한방 맞은 꼴입니다. 아픕니다. 정신이 아뜩합니다. 이제 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 보아 우리의 참모습을 만들어 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난세야 말로 호시절’이란 말씀도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면 넘어진 땅이 재기의 토대가 되고 마음만 흐트리지 않으면 난세를 빌어서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힘들다’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며 시절만 탓하다보면 정말 힘들어 죽고맙니다.
나는 청년시절에 일본 경찰에 잡혀 감옥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서 학교를 다니다가 느닷없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죄라야 일본인 학생들을 때려주고 골탕먹이는 정도지요. 그런데 감옥까지 들어가다니 정말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과학에 관심이 많던 내가 당시로선 구하기도 힘들고 일반인이 소지해서는 안되는 부속품들을 좀 모아갖고 있었던 것이 독립군을 돕는 것으로 오해되어 치른 옥고였지만 그곳에서 나는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석주 스님(오른쪽)과 환담하는 숭산 스님.

어떤 경우에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였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을 실감했던 것이지요. 일본인 형사들은 아예 나를 독립운동하는 학생으로 표적을 정해두고 심문을 했습니다. 그들의 질문 한마디를 어떻게 받아 넘기느냐에 내 삶의 방향이 달려있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쌀 암매상이나 고기 암매상들이 “어떤 걸 물어도 정신을 차리고 곰곰히 생각해보고 대답하라”고 조언을 했기에 나는 내가 어떤 일에 휩쓸려 있고 나의 대답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린 나이에 감옥과 일본 형사라는 환경에서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을 바로 갖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 셈입니다.
우리의 경제가 어려우면 그 어려워진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 원인을 봐야합니다. 참선 수행법에 관(觀)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국민들도 경제대란의 원인을 제대로 관해야 합니다. 머리로 계산해서 알아내는 것은 관이 아닙니다. 분석이고 추산일 뿐입니다. 관이란 마음의 잣대, 다시말해 우리의 정신 상태까지를 철저히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날 우리가 받고있는 고통의 근원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목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섣불리 세계화라는 거창한 구호를 목표로 삼은 과거의 허세를 걷어내야 합니다. 요즘 거품을 뺀다는 말이 유행입니다. 우리 경제가 거품위에 떠 있다가 이제야 땅으로, 우리의 현실로 그 발을 붙이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들 정신 속의 거품도 속속들이 빼내야 합니다. 세계화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나는 세계화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국화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경제, 문화, 사상은 급변하는 사회 정치 경제질서 속에서 국적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민족이 태어나 살아온 땅인 이 한국이란 국적을 잃어 버리고 서양식에만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화도 못한채 세계화를 넘보다가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한국화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화적 뿌리, 우리의 정신사상적 뿌리를 올바르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다가 현대화의 정치 경제 문화를 접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30년간 세계 30여개국에 160여개의 홍법원과 선센터를 세우며 불법의 세계화를 위해 뛰었습니다. 내가 무슨 사업가여서 세계에 그렇게 많은 사무소를 설치하고 외화를 벌었으면 참으로 국익에 보탬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수행자로서 돈이 아닌 정신으로 국익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아상을 보이는 것 같지만 여러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했던 원인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66년 일본의 수도 동경에 홍법원을 세운 이후 대만과 미국 등 서구 유럽에 차례로 홍법원을 세워 그곳 현지인들에게 선수행을 가르칠 수 있었던 원인. 여러분은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한국선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었거나 스피노자의 철학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과학 기술 분야거나 정치경제학이었어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나는 한국의 선수행법을 가지고 해외를 다니며 전법을 하는 수행자일 뿐이었습니다.

한국의 선이 서구 유럽에는 생소한 것이었고 그들의 황폐한 정신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기에 그렇게 긴 세월간 세계를 무대로 전법의 길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도 그 길은 이어지고 있고 나를 인연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스님들과 똑같이 수행하는 눈푸른 스님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우리에게도 서구유럽인들이 가진 정신적인 고급문화,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의 통치와 동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서양열강의 군사정치 논리에 정신을 잃었었습니다. 미처 그 정신을
찾기도 전에 자본주의의 달콤한 맛에 빠져 또 한번 정신을 잃어 버렸던 것 입니
다. 그러다보니 한국화, 한국적인 것을 챙기지도 못하고 세계화의 깃발을 달고 높
히 날아가는 꿈만 키웠던 것입니다.


세상의 무슨 일에든 목적과 목표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앞길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IMF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해서는 안됩
니다. 그것은 짧은 견해일 뿐입니다.


아까 땅에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
장 우리의 목표는 IMF를 빌어서 정말 한국적인 기업, 진실로 한국적인 경제구조
를 창출해 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굵고 깊은 뿌리가 있는 경제대국을 세워
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장의 일이 급합니다. 외화를 벌어야 하고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목표는 보다 더 멀고 높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터무니 없이 높게
목표만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첫발을 내디디며 다음을 준비하는’ 마음을 가져
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데도 먼저 그 목적을 바로 알고 갈길을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
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들 아시는대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무
엇을 깨닫는 겁니까. 이렇게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는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옛날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如何是佛法)?”

“봄날 닭우는 소리이니라(春日鷄聲).”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봄날 닭우는 소리라니. 봄
날에 닭이 우는 소리가 어떻게 불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봄날 닭우는
소리를 알면 인생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했잖습니까. 닭 우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가 그 소리를 들었나요. 내가 들었습니다. 무엇으로 들었
는가요. 귀로 들었습니다. 그럼 죽은 사람의 귀도 뚫려 있는데 그 죽은 사람도 들
을 수 있을까요. 없겠지요. 그럼 나는 무엇으로 봄날 닭의 울음 소리를 들었습니
까.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자, 이렇게 자기의 근원을 캐 묻고 또 캐 묻는가운데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
습니다. 불교를 봄날 닭우는 소리라 해서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이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닭울음 소리에도 불법의 적적대의(的的大義)가 들어 있는 겁니다.
익히 들어 본 것이지만 선문답을 더 들어 봅시다.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삼
서근이니라(麻三斤).” 또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
입니까(如何是佛)?” “마른 똥 막대기니라(乾屎궐).” 불교를 묻는데 이런 괴상한
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어떻게 부처를 똥막대기에 비유한다는 겁니까. 모를 일입
니다. 모른다는 것은 그 말을 한 놈이나 듣는 놈이 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모르느냐. 그 말한 것, 부처나 똥막대기 마삼근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대화하는 너와 나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또 무엇이냐. 그것은 곧 부
처입니다. 마조스님의 유명한 공안이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마음
이 곧 부처니라(心卽是佛).”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如何是心)?” “부처가 곧
마음이다(佛是卽心).” 마음과 부처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란 것인데 문답은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부처냐고 다시 물어 보는데 그때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
佛)라고 합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집착이 없어서
부처에게 의지하지도 않고 마음에 매달리지도 않는 곳에서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
니다.


이렇게 말로 하면 장난 같기도 하고 도무지 헷갈려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선 공부하는 이들에게 기본이 되는 이 화두들을 들어 설명하는 것은 불교를 쉽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묻는 말은 한결 같습니다. “무엇이 부처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가지각색입니다. 말로 글로 이름지어진 것에 집착해서는 그 도리를
절대 알지 못합니다. 태양을 일본사람은 ‘다이요’라 부르고 미국 사람들은
‘Sun’이라 부릅니다. 그렇다고 태양의 본질이나 그 빛이 변하는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이라 부르던 상관없이 태양은 그렇게 떴다 집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인간이라는 ‘나’를 비롯해 모든 사물의 진실, 그 본래의
모습입니다. 진실된 모습,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섣불리 이름을 붙여 버리는데서
우리의 번뇌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면 무엇을 깨달을 것인지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깨달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장서방이 장에 가니 나도 간다는 식으로 불교를 믿으면 번뇌의 그늘만 더 커지는
겁니다.

요즘의 경제위기도 우리가 우리의 본질, 우리 나라의 현실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하
고 다른 나라가 가는 길이 위대하게만 보여서 무작정 그 길을 따라 가다가 만난
막다른 길인 것입니다. 옛 선사들이 끊임없이 “무엇이 불교인가”를 물었듯이 현
대인들도 끊임 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대에 맞는 불교의 실체가 보일 것입
니다. 진리를 향한 구도심이 없는 세상은 경제, 정치, 도덕, 문화도 없습니다. “무
엇이 불교입니까?”라고 묻듯 “무엇이 정치입니까?” “무엇이 경제입니까?”라
고 물어 봅시다. 오늘의 어려움이 극복될 것입니다.

정리=임연태 기자

2004-11-30 오후 5:54:00
2004/11/30 16:58 2004/11/30 16:58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2

“세계는 한송이 꽃이예요”

우리의 좋은 것은 반드시 지키고 남의 좋은 것은 대범하게 수용
과학과 지식만으로 인류 책임질 수 없어 인간성 회복 시급해요



숭산 스님.

1970년대 후반, ‘지구촌’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낼 때만 해도, 그것은 그리 실감나는 말이 아니었다. 아주 먼 훗날의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들머리에 선 지금, ‘지구촌’이라는 말은 ‘세계화’라는 말로 옷을 바꿔 입고 우리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 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낸 결과이다. 인터넷의 등장이 1980년대의 중반이고 보면, 불과 15년의 세월이 인류의 지난 몇천년을 능가하는 문명사적 전환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제 ‘세계화’는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이미 세계화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할 바가 있다면, 19세기의 가치와 20세기의 시스템과 21세기의 비전이 혼재한 상황에서 ‘세계화’된 ‘세계’가 요구하는 ‘우리 다움’을 추스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알아 보기 위해 북한산 자락의 화계사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미 30여년 전부터 한국 선불교의 세계화를 실현하고 있는 숭산 큰스님을 만나 뵈었다.


― 큰스님께서는 ‘세계화’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인 1966년부터 일본 홍법원의 개설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 한국 선불교를 전파하시고 있습니다. 특별한 동기나 원력이 있었는지요. ▲ 일찍이 만공 스님께서 수덕사에 계실 때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말을 남기셨어요. ‘세계는 한 꽃’이라는 뜻인데, 세계의 실상을 이보다 더 멋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실 세계는 한 송이 꽃이예요.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포교에 나선 겁니다. 만공 스님께서 말로 하신 것을 나는 실천에 옮긴 것이지요.



숭산 스님.

― 지금까지 몇 나라에나 선방을 여셨습니까?
▲ 32개국에 130여개의 선방을 열었어요. 한창 때는 한해에 지구의 두 바퀴를 돌기도 했지요.

― 언어와 문화, 관습 등이 제각기 다른 그 많은 나라에 한국의 선불교를 심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특별한 방편 같은 게 있었을 법한데요. ▲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겁니다. 내 식만을 고집해서는 곤란해요.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그 나라의 법식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각 개인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을 하는 것처럼 각 나라의 풍속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는 특별한 통제와 간섭이 필요없어요. 목탁을 치고 설법 준비를 하기도 전에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기다립니다. 반면에 프랑스 사람들의 경우는 반대예요. 시간이 다 되어야 어슬렁어슬렁 모이는 사람들이 프랑스인이예요. 그게 바로 그 나라 사람들의 국민성이라는 겁니다. 무엇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예요. 이렇듯 나라마다는 각기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존중해야만 포교가 가능해요. 그래서 저는 어떤 나라에 가든지 그 나라의 영웅에 대해 험담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 평범 가운데 숨겨진 비범이라 할 방편인 것 같습니다. 이걸 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적 상대주의라고 말하는데, 세계화된 사회의 국제적 매너 또한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가 ‘세계화’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스런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세계화가 곧 서구화인 양 무분별하게 서구를 뛰좇는 경향이 대표적인 경우인데요, 상당히 걱정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그 점에 대해서는 좋은 예가 있어요. 한 15년 전쯤의 일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 신도와 미국 신도들이 함께 모여 파티를 했어요. 그런데 아주 재미난 현상이 벌어졌어요. 미국 사람들은 다 젓가락을 사용해서 음식을 먹는데,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음식을 먹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이건 거꾸로 된 게 아니냐.” 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미국 법사 한 사람이 뼈 있는 농담을 하더군요. “동양 문화 가운데는 본받을 게 참으로 많은데 동양 사람들은 그것의 중요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바로 그거예요. 우리 것 중에서 좋은 것은 반드시 지키고 남의 것 중에서도 좋은 것은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동양의 정신과 소중한 전통을 버리고 서구를 따르는 것은 인류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 말씀을 듣고 보니 미국인이 한국의 선불교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교훈 삼을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 미국인들이 젓가락을 사용하는 걸 보세요. 한국 음식을 먹는 데는 젓가락이 훨씬 더 편리하다는 걸 알아차린 겁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선의 정신’이야말로 자신들이 애타게 찾던 삶의 빛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지요.


― 다시 화제를 세계화의 문제로 돌려 보겠습니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의 실상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사물의 연기(緣起)적 관계가 국가간의 관계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화의 이념적 바탕이 ‘탈국가주의’인 것도 그렇고, 실제로 세계화의 진전 양상이 ‘국제적 상호의존성’의 증대라는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의 세계화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자 바람직한 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국가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기도 하고 애당초 국경의 개념이 없는 공해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인종과 종교 문제로 인한 분쟁이 끊이질 않고 범죄 또한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가히 인류 파멸의 징후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 그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인구의 급속한 팽창에 있어요. 1945년, 그러니까 우리 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해의 세계 인구가 약 20억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60억을 넘었어요. 몇천년 동안 증가한 인구가 20억인데 불과 30년 사이에 40억 가까운 인구가 늘어난 겁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먹거리예요. 더 중요한 것은 먹을 것의 부족이 아니라 지나침에 있어요. 못살던 시절에는 배고픈 것만이 문제였어요. 고기 한점이라도 먹으려면 명절이나 가능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엄밀한 의미에서 살생이 생활화 된 거예요. 불교 신자의 입장에 그 많은 생명들의 윤회와 환생을 생각해 보세요.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될 수밖에 없어요. 둘째, 구 소련의 붕괴와 함께 이념이 퇴조하면서 갑자기 방향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이제 붙잡을 것이라곤 경제밖에 없어요. 경제라는 게 뭡니까? 그 거, 개가 똥덩어리 좇아가는 것과 똑같아요. 물론 인간이 살아가려면 경제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얘기 하는 경제 문제는 그것과 차원이 달라요. 오로지 먹을 것에만 혈안이 된 동물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발버둥치는 형국이예요. 셋째, 인간의 기계화예요. 요즘은 컴퓨터가 그것을 더 가속화시키고 있어요. 앞으로 인공 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하는데, 기계 문명과 인간의 불화는 지금과는 또다른 모습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 이렇게 원인을 진단하셨으면 처방도 있을 법한데요.
▲ 인간성 회복이 시급해요. 먼저 교육 현장에서부터 인성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과학과 지식으로 머리통만 비대해진 인간으로는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생각할 수 없어요. 기계화된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인간성이라는 걸 기대할 수 있겠어요. 머리와 몸의 조화,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 중요한 겁니다. 인간성이 회복되어야만 ‘올바른 관계, 올바른 위치, 올바른 수용’이 될 수 있고 세계 평화도 이루어지는 겁니다.

― ‘올바른 관계, 올바른 위치, 올바른 수용’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일러 주시지요. ▲ 올바른 관계란, 말 그대로 바람직한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국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결코 인간은 자연을 함부로 파헤칠 수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한 몸인 관계를 투철히 알아야만 환경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위치란, 각자의 역할에 대한 자각입니다. 가정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지신의 위치가 있어요. 그 위치를 제대로 인식해야만 바람직한 행동이 나와요. 그것을 모르니까 자기 식의 고집을 하게 되는 겁니다. 흔히 악법이라고 말하는 세간법을 보세요. 그건 사회적 고집입니다. 그런 고집이 순리를 거스를 때, 불화가 생기고 혼란이 오는 것이지요. 그럼 올바른 수용이란 뭐냐, 제대로 받아들여서 제대로 쓰는 겁니다. 머리 속에 쓸데없는 지식이 너무 많은 것이 현대인의 병통이예요. 본연의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르게 쓰라는 겁니다.

― 너무 귀하신 말씀이어서 거듭 여쭙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 갑자기 한꺼번에 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처지에 맞추어서 고쳐 나가야 합니다. 중생 교화라는 것도 그래요.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교화시킵니까. 그러면 또 반발이 생겨요.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남에게 잘하라고 할 것이 없어요. 스스로 잘하면 옆에 있던 사람도 따라하게 돼 있어요. 나 자신을 정화시키는 일이 곧 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입니다.

― 이렇게 말씀을 듣고 보니까 과학과 합리로 길들여진 미국인들이 스님의 제자가 되어 불교에 귀의를 하는 까닭을 알 것도 같습니다. 잠시 책 얘기 좀 하겠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선불교의 고전이 된 <부처님께 재를 털면(Dropping ashes on the buddha)>이라는 책을 보면 참으로 독특한 스님만의 선풍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 알려진 한국의 선불교를 ‘숭산불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식으로 하면 숭산 가풍이 되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지 일러 주시면, 많은 부분에서 서구화된 오늘의 한국 사람에게도 ‘반면 교사’가 될 것 같습니다. ▲ 남녀노소나 승속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로지 수행만을 강조할 뿐입니다. 합리와 이성으로 길들여진 그들은 지식의 차원에서 보면 최고의 엘리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그들 머리 속에 가득 채워진 지식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들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충격을 받는 한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그들에게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인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대화의 바탕을 우리는 미국식으로 ‘공안 인터뷰’라고 합니다. 이 공안 인터뷰의 특징은 스승과 제자가 마주한 그 순간의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곧 진리임을 스스로 체득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 긴 시간 동안 참으로 귀한 말씀을 현대불교 독자들과 함께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의 말씀은 한국 불교의 세계화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세계화 또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아울러 성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마디 더 일러 주시지요. ▲ 21세기 인류의 대안은 선입니다. 참선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성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수행들 하세요.

삼배 올리고 물러 나오는데, 하얀 고무신을 신은 눈푸른 외국인 행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나이키’ 신발을 신고 조계사 앞을 지나는 스님들이 떠오른 건 무슨 심사에서였을까? ‘세계화’의 참뜻을 다시금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대담=윤제학 부장
(jhyun@buddhapia.com)

2004-11-30 오후 5:48:00
2004/11/30 16:56 2004/11/30 16:56

다시 듣는 숭산 선사 법문 1

“우리는 오직 모를 뿐”
“언제나 이순간 밖에 없다 아무것도 집착하지 말라”

서양인들 설교식 불교 원치않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보고파 해




계룡산 국사봉 자락에 위치한 국제선원 무상사에서도 3개월 동안 용맹정진을 다짐하는 결제 법회가 열렸다. 이번 결제 법회에는 특별히 화계사 조실인 숭산 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해주시기로 한 까닭에 무상사는 아침부터 큰 스님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오전 10시경 숭산 스님과 화계사 대중들이 무상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대중들이 “헬로우, 하우아 유?(안녕, 잘 지냈어요?)”하며 서로 정겹게 악수하고, 포옹하며 가벼운 볼 키스까지 나누는 풍경이 자연스럽고 다정해 보였다.

숭산 스님도 대중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헬로 에브리바디(여러분 안녕하세요), 결제일입니다. 결제일이라는 것은 마음을 텅 비우고,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드디어 법회가 시작됐다. 무상사 선원동 2층 법당 앞쪽에 대중들을 마주보며 숭산 스님과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 주지 오진 스님, 그리고 통역을 맡은 도관스님이 나란히 앉았다. 주지 스님과 조실 스님의 짧은 인사와 법문이 끝나고, 숭산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에 와서 결제를 하게 되고, 이곳 무상사가 수행하기에 얼마나 좋은 장소인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숭산 스님.

무상사는 백두산에서부터 태백산을 거쳐 계룡산으로 이어진 국사봉 정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계룡산은 그 드높고 신비한 힘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동학사, 갑사, 신원사와 같은 큰 사찰들이 계룡산에 자리를 잡았으며, 한국 근대 불교의 정신적 스승인 경허·만공 스님과 같은 위대한 선사들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였습니다. 2년 후 무상사가 완공되면 이곳은 옛 선인들이 예언했던 대로 한국을 돕고, 세계를 도울 훌륭한 스승들이 여럿 나올 것입니다. 예로부터 큰 사람이 날려면 그 터를 보라고 했습니다. 명당이 아니고서는 훌륭한 도인이 나올 수 없습니다. 장소와 시간, 노력 모든 것이 들어맞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앞으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에는 세계 평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대중 모두가 저마다 큰 원력을 갖고, 무상사에서 참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널리 중생 제도를 위해 힘써 주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법문은 짧고 간단하면서도 힘찼다. 숭산 스님은 평소에도 긴 법문을 하지 않는다. 제자들의 질문에 간단한 대답으로 응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지도한다. 이는 순간 순간의 연결을 통해 제자와 스승의 밀접한 관계를 이루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숭산 스님은 줄곧 이 방법을 고수해 왔다.

이날 법회에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70여명이 동참했다. 이들은 3개월간 무상사 선원에서 함께 수행할 것을 서원했다. 보통의 한국 선원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다. 승속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본성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승속을 초월해 모든 대중이 똑같이 수행한다. 최근 재가불자들이 안거수행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스님은 스님들만의 공간에서, 재가불자들은 또 다른 공간에서 각각 따로 수행을 하고 있음에 비추어 파격적이다.

숭산 스님의 안거 수행지도 방법 또한 전통적인 한국의 수행지도 방법과 다르다. 철저한 묵언수행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법회를 연다. 이때 참석자들은 수행에 대한 모든 질문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숭산 스님과 제자사이에 오가는 질문과 대답을 ‘공안인터뷰’라고 하는데, 숭산 스님은 이번 동안거 기간 중에도 화계사와 무상사를 오가며 공안인터뷰를 통해 제자들의 수행을 점검, 지도할 계획이다.

지난 30년간 해외 포교를 통해 숭산 스님이 배출한 서양인 제자는 5만명이 넘는다. 그 제자들의 공통적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서양철학에 심취하고, 기독교적 전통에서 살아왔으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삶의 방향과 목표를 찾지 못했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그 의문들을 풀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읽었던 많은 책의 지식과 논리적 근거들을 버리고, 원래 그대로의 본성인 마음자리로 향하는 수행의 길에 올랐다. 이미 자전적 에세이집 <만행>으로 유명해 진 현각스님(미국인)을 비롯해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미국인), 무상사 주지 오진스님(폴란드인) 등이 모두 그러한 인연들로 이국땅인 한국에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다.

이 스님들은 모두 숭산 스님의 생활 자체가 그대로 가르침이며 귀감이 된다고 말한다. 숭산 스님은 “언제나 이 순간 밖에 없다. 아무 것도 집착하지 말라. 우리는 오직 모를 뿐이다! 공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과 같이 있는 것이다. 우리 생활과 떨어진,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영향을 그대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본래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을 구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제자들과 신도들은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관계, 행동으로 자신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는 숭산 스님을 수행자의 사표로 삼아, 스승의 삶을 바로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본래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하나씩 터득해 나간다.

오래 전 숭산 스님이 제자들과 멕시코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곳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숭산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하러 대봉 스님이 숙소를 찾아갔다. 그때 스님은 잠에서 깨어나 속옷 차림으로 대봉 스님을 반갑게 맞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스님이 숭산 스님을 찾아왔다. 숭산 스님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 스님을 반갑게 맞았고,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나서 잠시 후에 한국인 제자 스님이 숭산 스님을 찾아왔다. 숭산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고리와 마고자를 차려입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지 헤아리는 스님은, 찾아오는 제자들에 따라 옷 입는 그 한 가지에도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신 것이다. 그때 대봉 스님은 숭산 스님의 작은 행동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 이번 동안거 결제 법회 날 아침 대봉 스님은 몇몇 스님들과 유성의 여관으로 숭산 스님을 모시러 갔다. 한국인 시자 스님과 외국인 스님들이 큰 탁자에 둘러앉았는데, 숭산 스님이 언제 준비해 오셨는지 사탕, 과자, 빵 등을 한아름 내놓고 먹으라고 권했다. 계룡산 산골에서 군것질거리가 궁했을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직접 휴게소에서 사 오신 것이다. 외국인 제자들은 그 과자들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자 한국인 시자스님이 과자, 빵을 다시 숭산 스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숭산 스님은 다시 그 과자들을 앞으로 내어 놓았고, 몇 번의 오고감 속에서 모두의 눈빛이 하나로 모아졌다.

대봉 스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다르다. 생활방식과 문화도 다르다. 어떻게 그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가? 이것이 숭산 스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가르침이다. 숭산 스님은 진정으로 모르는 마음을 가지고, 집착 없이 모든 상황들에 대처하라고 당신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말없는 법문을 항시 해 주시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덧붙여서 대봉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불자들은 기도와 명상 외에는 관심이 없다. 대부분이 수행을 통해 마음이 맑아지고 깨달음을 얻길 원한다. 기독교적 선교 방식에 피곤해져 있는 서양인들은 불교의 스님들이 행동으로 실천하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설교식으로 하는 불교를 원치 않는다. 숭산 스님은 한국인 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방식이나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 가시더라도 그 나라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린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구하는 바가 바르고, 마음이 맑을 뿐. 순간에 한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올바른 방향을 보여줄 수 있나를 몸소 보이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가 참 힘들다.”

이렇듯 제자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 진정한 보살도로 이끌어 주는 숭산 스님. 매일 매일의 생활수행을 통해 우리 자신을 깨우고, 이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중생 제도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숭산 스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우리는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만물은 공(空)하므로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한 길입니다. 이것을 지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됩니다. 수행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실제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이고 경계가 없으며, 나의 모든 행동이 순간순간 중생을 향한 큰 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실 본래 ‘나’라는 것도 없으므로 다른 중생을 위한다는 말조차 틀린 말입니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 길에는 생각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순간순간의 모든 행동은 진리이며 완벽하게 다른 중생의 고통과 닿아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도와 줄 수 있을까?’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며, 완벽한 길이며, 진리의 길입니다.”

무상사에서의 동안거 결제 법회가 끝나고, 숭산 스님은 무상사를 떠나기 전에 제자들과 요사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오! 에브리바디 히어. 원더풀, 원더풀.(여러분 다 여기 모여 있었군요. 좋아요)” 특유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로 숭산 스님은 제자들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차에 올라타 무상사를 뒤로 하면서도 연신 손을 흔들며 “바이, 바이”를 외치는 스님과 합장으로 배웅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큰 스님의 그늘이 얼마나 크며 포근하고, 또 소중한 것인지 알수 있었다.

글=이은자 기자 ejlee@buddhapia.com
사진=고영배 기자 ybgo@buddhapia.com



숭산스님은?

숭산 스님은 제자들로부터, 존경하는 선의 선생님이라는 뜻인 ‘선사(禪師)님’으로 불린다.

30년 이상 전 세계를 돌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온 숭산 스님. 그동안 세계 30개국에 세워진 선원만 120여 군데나 되고, 교수 박사 등 엘리트층의 일반신도를 비롯해 신부 수녀 목사 등에 이르기까지 인종과 언어, 문화와 종교를 초월한 폭넓은 포교를 해왔다.

숭산 스님은 5년 전 부터 전 세계의 불교신자들이 함께 모여 수행할 수 있는 국제선원을 계룡산에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계룡산 국제선원에서 수행하여, 법사나 선사가 된 후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 선원을 세우고 한국식 불교를 가르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숭산 스님은 47년 마곡사에서 출가해, 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58년 화계사 주지, 60년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66년 일본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홍콩, 미국, 캐나다, 브라질, 프랑스, 싱가포르 등에 홍법원과 국제선원을 개설하며 적극적인 해외 포교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이며, 화계사 조실이다.

2004-11-30 오후 5:41:00
2004/11/30 16:55 2004/11/30 16:55

헌법재판소 수도이전법 위헌결정 전문
[경향신문 2004.10.21 16:29:06]
        


◎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이상경 재판관)는 2004. 10. 21. 수도의 이전을 내용으로 하는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우리 헌법체계상 자명하고 전제된 불문의 관습헌법사항을 헌법개정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법률의 방식으로 변경한 것이어서 그 법률 전체가 청구인들을 포함한 국민의 헌법개정국민투표권을 침해하였으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 이 결정은 이 사건 법률이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된다는 김영일재판관의 별개의견과, 국민투표권을 포함한 청구인들의 기본권 침해의 가능성 자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부적법 각하하여야 한다는 전효숙재판관의 반대의견이 있는 외에는 나머지 재판관들의 의견일치에 의한 것이다.

1. 사건의 개요(1)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은 2004. 1. 16. 공포되어 같은 해 4. 17.부터 발효되었다. 이 법률에 근거하여 발족한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는 2004. 7. 21. 주요 국가기관 중 중앙행정기관 18부 4처 3청(73개 기관)을 신행정수도로 이전하고, 국회 등 헌법기관은 자체적인 이전 요청이 있을 때 국회의 동의를 구하기로 심의·의결하였다. 한편 2004. 8. 11. 위 위원회는 ‘연기-공주 지역’(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금남면, 동면, 공주시 장기면 일원 약 2,160만평)을 신행정수도 입지로 확정하였다.

(2) 청구인들은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국민들로서, 위 법률이 헌법개정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수도이전을 추진하는 것이므로 법률 전부가 헌법에 위반되며 이로 인하여 청구인들의 국민투표권, 납세자의 권리, 청문권, 평등권 등의 기본권을 침해받았다는 이유로 위 법률을 대상으로 그 위헌의 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였다.

2. 심판의 대상이 사건 심판의 대상은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 (2004. 1. 16. 제정 법률 제7062호, 이하 ‘이 사건 법률’이라 한다)이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이다.

3. 주 문신행정수도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2004. 1. 16. 법률 제7062호)은 헌법에 위반된다.

4. 결정의 요지가. 이 사건 법률의 내용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수도는 국가권력의 핵심적 사항을 수행하는 국가기관들이 집중 소재하여 정치·행정의 중추적 기능을 실현하고 대외적으로 그 국가를 상징하는 곳을 의미한다. 이 사건 법률은 신행정수도를 “국가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는 수도로 새로 건설되는 지역으로서……법률로 정하여지는 지역”이라고 하고(제2조 제1호), 신행정수도의 예정지역을 “주요 헌법기관과 중앙행정기관 등의 이전을 위하여 ……지정·고시하는 지역”이라고 규정하여(같은조 제2호), 결국 신행정수도는 주요 헌법기관과 중앙 행정기관들의 소재지로서 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는 수도가 되어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은 비록 이전되는 주요 국가기관의 범위를 개별적으로 확정하고 있지는 아니하지만, 그 이전의 범위는 신행정수도가 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정도가 되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 법률은 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기관의 소재지로서 헌법상의 수도개념에 포함되는 국가의 수도를 이전하는 내용을 가지는 것이며, 이 사건 법률에 의한 신행정수도의 이전은 곧 우리나라의 수도의 이전을 의미한다.

나. 수도가 서울인 점이 우리나라의 관습헌법인지 여부(1) 성문헌법체제에서의 관습헌법의 의의우리나라는 성문헌법을 가진 나라로서 기본적으로 우리 헌법전(憲法典)이 헌법의 법원(法源)이 된다. 그러나 성문헌법이라고 하여도 그 속에 모든 헌법사항을 빠짐없이 완전히 규율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헌법은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간결성과 함축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형식적 헌법전에는 기재되지 아니한 사항이라도 이를 불문헌법(不文憲法) 내지 관습헌법으로 인정할 소지가 있다. 특히 헌법제정 당시 자명(自明)하거나 전제(前提)된 사항 및 보편적 헌법원리와 같은 것은 반드시 명문의 규정을 두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헌법사항에 관하여 형성되는 관행 내지 관례가 전부 관습헌법이 되는 것은 아니고 강제력이 있는 헌법규범으로서 인정되려면 관습헌법의 성립에 요구되는 요건들이 엄격히 요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2) 기본적 헌법사항으로서의 수도문제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는 수도를 정하는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을 표현하는 실질적 헌법사항의 하나이다. 여기서 국가의 정체성이란 국가의 정서적 통일의 원천으로서 그 국민의 역사와 경험, 문화와 정치 및 경제, 그 권력구조나 정신적 상징 등이 종합적으로 표출됨으로써 형성되는 국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수도를 설정하거나 이전하는 것은 국회와 대통령 등 최고 헌법기관들의 위치를 설정하여 국가조직의 근간을 장소적으로 배치하는 것으로서,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임과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에 속하는 것이다.

(3) 수도 서울의 관습헌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가) 우리 헌법전상으로는 ‘수도가 서울’이라는 명문의 조항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서울은 사전적 의미로 바로 ‘수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392년 조선왕조가 창건되어 한양이 도읍으로 정하여진 이래 600여년간 전통적으로 현재의 서울 지역은 그와 같이 일반명사를 고유명사화하여 불러 온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서울 지역이 수도인 것은 그 명칭상으로도 자명한 것으로서, 대한민국의 성립 이전부터 국민들이 이미 역사적, 전통적 사실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에 즈음하여서도 국가의 기본구성에 관한 당연한 전제사실 내지 자명한 사실로서 아무런 의문도 제기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 후에도 수차의 헌법개정이 있었지만 우리 헌법상으로 수도에 관한 명문의 헌법조항은 설치된 바가 없으나, 서울이 바로 수도인 것은 국가생활의 오랜 전통과 관습에서 확고하게 형성된 자명한 사실 또는 전제된 사실로서 모든 국민이 우리나라의 국가구성에 관한 강제력 있는 법규범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 수도 서울의 역사적 존속 경위1) 조선의 창건과 서울의 수도설정·계속서울은 일찍이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이 설치되어 고려의 이른바 삼경제를 이루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왕조의 창건 직후 곧 수도가 되었다. 한양 즉 서울의 수도로서의 지위는 성종 때에 완성된 조선의 기본법전이었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국대전에는 한성부가 경도(京都) 즉 서울을 관장한다고 명시하여 한성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법상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경국대전의 내용은 개정됨이 없이 조선왕조가 존속한 500여년의 장구한 기간동안 계속하여 국가생활의 기본적인 최고법규범으로서 효력을 유지하였다.

2) 일제강점시대의 서울의 수도성 유지1910. 8. 한일합방에 의하여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는 상황이 시작되었으나 이후에도 경성부(京城府), 즉 서울은 우리나라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으며,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1919. 3. 1. 민족대표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이 선언된 곳이기도 하였다. 비록 일제의 국토강점으로 인하여 국가조직이 와해된 상태에 있었지만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의 대외적인 상징성을 유지하였고 임시정부에서도 서울의 수도성을 당연한 전제로 하여 항일활동조직을 편성하였으며 국민들의 의식도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울의 수도성은 이 시기에도 사실상 유지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3) 해방과 건국 이후 현재까지의 서울의 수도성 유지해방 이후 서울이 수도인 것을 언급하는 법률조항들이 계속 존재하여 왔으나, 이들은 서울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수도라는 점을 이미 존재하는 규범적 전제로서 받아들이면서 이를 기준으로 수도 서울의 특별한 지위를 법률적으로 설정하기 위한 조항들이었고, 법률의 차원에서 서울이 수도인 점을 확정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이러한 입법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서울이 수도인 점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전통적인 법적 확신이 확인된다.

(다) 그렇다면 수도가 서울로 정하여진 것은 비록 우리 헌법상 명문의 조항에 의하여 밝혀져 있지는 아니하나, 조선왕조 창건 이후부터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장구한 기간동안 국가의 기본법규범으로 법적 효력을 가져왔던 것이고, 헌법제정 이전부터 오랜 역사와 관습에 의하여 국민들에게 법적 확신이 형성되어 있는 사항으로서, 우리 헌법의 체계에서 자명하고 전제된 가장 기본적인 규범의 일부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불문의 헌법규범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라) 이를 관습헌법의 요건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인 것은, 서울이라는 명칭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이래 600여 년 간 우리나라의 국가생활에 관한 당연한 규범적 사실이 되어 왔으므로 오랜 전통에 의하여 형성된 계속적 관행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계속성), 이러한 관행은 변함없이 오랜 기간 실효적으로 지속되어 중간에 깨어진 일이 없으며(항상성),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면 개인적 견해 차이를 보일 수 없는 명확한 내용을 가진 것이고(명료성), 나아가 이러한 관행은 장구한 세월동안 굳어져 와서 국민들의 승인과 폭넓은 컨센서스를 이미 얻어(국민적 합의) 국민이 실효성과 강제력을 가진다고 믿고 있는 국가생활의 기본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서울이 수도라는 점은 우리의 제정헌법이 있기 전부터 전통적으로 존재하여온 헌법적 관습이며 우리 헌법조항에서 명문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명하고 헌법에 전제된 규범으로서,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에 해당한다.

다. ‘수도 서울’의 관습헌법 폐지를 위한 헌법적 절차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점에 대한 관습헌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 헌법개정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문의 수도조항이 존재한다면 이를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이 필요하겠지만 관습헌법은 이에 반하는 내용의 새로운 수도설정조항을 헌법에 넣는 것만으로 그 폐지가 이루어진다. 예컨대 충청권의 특정지역이 우리나라의 수도라는 조항을 헌법에 개설하는 것에 의하여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은 폐지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헌법규범으로 정립된 관습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의 흐름과 헌법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에 대한 침범이 발생하고 나아가 그 위반이 일반화되어 그 법적 효력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상실되기에 이른 경우에는 관습헌법은 자연히 사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멸을 인정하기 위하여서는 국민에 대한 종합적 의사의 확인으로서 국민투표등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고려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에 이러한 사멸의 사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인 것은 우리 헌법상 관습헌법으로 정립된 사항이며 여기에는 아무런 사정의 변화도 없다고 할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법개정의 절차에 의하여야 한다.

라. 국민투표권의 침해 여부수도의 설정과 이전의 의사결정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기본적 헌법사항으로서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민이 스스로 결단하여야 할 사항이다. 또한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인 점은 불문의 관습헌법이므로 헌법개정절차에 의하여 새로운 수도 설정의 헌법조항을 신설함으로써 실효되지 아니하는 한 헌법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개정의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수도를 충청권의 일부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이 사건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헌법개정사항을 헌법보다 하위의 일반 법률에 의하여 개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헌법의 개정은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되어(헌법 제128조 제1항)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따른 국회의 의결을 거친 다음(헌법 제130조 제1항) 의결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붙여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만(헌법 제130조 제3항) 이루어 질 수 있다. 따라서 헌법의 개정은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만 하므로 국민은 헌법개정에 관하여는 찬반투표를 통하여 그 의견을 표명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이 사건 법률은 헌법개정사항인 수도의 이전을 위와 같은 헌법개정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단지 단순법률의 형태로 실현시킨 것으로서 결국 헌법 제130조에 따라 헌법개정에 있어서 국민이 가지는 참정권적 기본권인 국민투표권의 행사를 배제한 것이므로 동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5. 결 론그렇다면, 청구인들이 제기한 다른 쟁점들에 대하여 더 나아가 판단할 필요도 없이, 수도의 이전을 확정함과 아울러 그 이전절차를 정하는 이 사건 법률은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불문의 관습헌법사항을 헌법개정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법률의 방식으로 변경한 것이어서 그 법률 전체가 청구인들을 포함한 국민의 헌법개정국민투표권을 침해하였으므로 헌법에 위반된다.

6. 재판관 김영일의 별개의견 요지이 사건 법률은 청구인들의 기본권인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 별개의견의 요지이다.

수도이전에 관한 의사결정은 헌법 제72조가 규정하는 국방‧통일 및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해당하므로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의 대상이 된다. 대통령이 어떠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의하는 행위는 자유재량행위이다. 그러나 법치주의의 원리는 어떠한 공권력의 작용이라도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요구하므로 대통령의 국민투표부의행위가 자유재량행위라고 하더라도 재량권의 일탈‧남용이 있는 경우에는 그 재량권의 근거규범인 헌법 제72조에 위반된다.

대통령이 수도이전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이지 아니하는 것은 헌법 제72조의 입법목적과 입법정신에 위배되고 자의금지원칙과 신뢰보호원칙에 반하므로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위헌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재량권을 적법하게 행사한다면 위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대통령은 수도이전에 관한 의사결정을 국민투표에 붙일 의무가 있다. 이에 국민은 위 대통령의 의무에 상응하는 권리인 국민투표권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사건 법률은 국민투표에 의하지 아니하고 수도이전의 의사결정을 한 것이어서 국민투표를 확정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한다.

수도의 위치가 관습헌법규범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가사 다수의견과 같이 관습헌법규범이라고 보는 경우에도 이 사건 법률이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나아가 헌법 제130조보다는 헌법 제72조에 의하여 이 사건 법률의 위헌성을 확인함이 보다 타당하다.

7. 재판관 전효숙의 반대의견 요지가. 나는 다수의견의 논지는 우리 헌법의 해석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힌다.

(1) 우선 오늘날의 헌법에서 과연 한 나라의 수도의 위치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수도의 소재지는 국가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사항이었으나, 자유민주주의와 입헌주의를 주된 가치로 하고 있는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의 통제와 합리화를 통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실현하려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다. 수도의 소재지가 어디이냐 하는 것은 그러한 헌법의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그러한 목적 실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사항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헌법상 수도의 위치가 반드시 헌법제정권자나 헌법개정권자가 직접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2) “서울이 수도”라는 관행적 사실에서 “관습헌법”이라는 당위규범이 인정되기 어렵다.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이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자명하게 인식되어 온 관행에 속한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이 그것을 강제력 있는 법규범으로 확신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들에게 수도의 위치가 성문헌법과 동등한 효력을 지니는, 즉 헌법개정절차에 의해서만 개정되어야할 정도의 법적 확신이 존재하여 왔다고 볼 수 없다. 수도이전 문제는 최근에야 우리 사회의 주된 쟁점이 되었고, 이 사건 법률의 입법과정에서도 여야 국회의원들은 수도이전 사안이 국민의 헌법적 확신을 지니는 헌법사항이라든가, 그 개정은 헌법개정절차를 통하여야 하므로 입법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든가 하는 점에 관한 인식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울이 수도이다”라는 사실로부터 “서울이 수도여야 한다”는 헌법적 당위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이다.

(3) 성문헌법을 지닌 법체제에서, 관습헌법을 성문헌법과 “동일한” 혹은 “특정 성문헌법 조항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효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다.

성문의 헌법전은 헌법제정권자인 국민들이 직접 “명시적” 의사표시로써 제정한 것으로서 국가의 법체계 중 최고의 우위성을 가지며, 그 내용의 개정은 엄격한 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는 점에서, 관습헌법과 성문헌법은 동일한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 성문헌법의 특징은 최고법규범으로서 모든 국가권력을 기속하는 강한 힘을 보유하는 것인데, 이는 국민주권의 명시적 의사가 특정한 헌법제정절차를 거쳐서 수렴되었다는 점에서 가능하다. 관습만으로는 헌법을 특징화하는 그러한 우세한 힘을 보유할 수 없는 것이다.

성문헌법 체제에서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에 대한 보완적 효력만을 가진다. 성문헌법이 존재하는 한,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으로부터 동떨어져 성립하거나 존속할 수 없고, 항상 성문헌법의 여러 원리와 조화를 이룸으로써만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적 관행에 의해서 성문헌법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되고 성문헌법전보다 불문적인 헌법의 관행예가 우선하고 국가생활을 지배하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법리는 관습헌법의 내용이 중요한 “헌법사항”이라 하더라도 동일하다. 국민들은, 설령 헌법제정시 자명한 사실이어서 성문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사항이 있더라도, 언제든지 그러한 사항을 성문 헌법전에 수록할 수 있는 헌법개정권력을, 자신의 대표자와 국민투표를 통하여 행사할 수 있고, 이로써 성문헌법의 효력을 가지게 할 수 있다. 마치 법률에 규정되지 않은 한 아무리 처벌필요성이 있는 사항도 처벌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문헌법에 규정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법적 효력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다수의견은 관습“법률”이 아닌 관습“헌법”은 “헌법”이므로 그 변경은 헌법개정절차를 통해야 한다고 하나, 이는 형식적 개념논리만 강조된 것이다.

“관습헌법”이란 실질적 의미의 헌법사항이 관습으로 규율되고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며, 관습헌법이라고 해서 바로 성문헌법과 똑같은 효력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성문헌법의 강력한 힘은 국민주권의 명시적 의사가 특정한 헌법제정절차를 거쳐서 나왔기 때문인데, 관습은 그러한 명시적 의사나, 특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인정되므로 성문헌법과 같은 효력을 인정할 근거가 없다.

다수의견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사항은 “국민이 스스로 결단하여야 할 사항”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와 한글의 경우도,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과 한글전용에관한법률에서 규율되고 있는데, 그러한 규정 형식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수도와 같은 관습헌법의 변경을 헌법개정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의 개정은 “형식적 의미”의 헌법, 즉 성문헌법과 관련된 개념이다. 헌법제정권자가 헌법개정을 일반 법률절차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를 거치도록 한 이유는, 헌법전에 규정된 내용이 주권자의 의지의 명시적 표명으로서 이를 함부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헌법에 들어있지 않은 헌법사항 내지 불문헌법의 변경은 헌법의 개정에 속하지 않으며, 우리 헌법이 마련한 대의민주주의 절차인 법률의 제정, 개정을 통하여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국회가 수도이전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민의를 대변하지 않고 당리당략적으로 입법한 것이라면, 그것이 헌법과 국회법 절차에 위반되지 않는 한, 그러한 입법의 궁극적 책임은, 국회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여야 하는 대의기관에 불과한 이상, 그러한 입법부를 구성한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다수의견의 논지에 따르면 아무리 국회가 이 사건 법률 제정과정에서 공청회와 청문회 등 충분한 국민의사 수렴절차를 거쳤고, 국회의원 전원일치로 법률이 통과되었더라도, 헌법개정절차를 거치지 아니하였다는 형식적 이유만으로 위헌이 되는데, 그러한 결론이 타당하리라 보기 어렵다.

(5)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의 변경은 헌법개정에 의해야 한다면, 이는 관습헌법이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입법권을 변경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관습헌법에 대하여 국회의 입법권보다 우월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제40조)고 규정하며, 헌법에 달리 규정이 없는 한 국회의 입법권은 포괄적 대상을 지닌다. 입법권의 주체는 다름 아닌 국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된 대의기관이며, 헌법은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대의제를 기본형태로 채택하고, 국민으로부터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표기관이 입법작용을 통하여 그 이념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수도이전과 같은 헌법관습의 변경의 경우, 별도로 이를 제한하는 헌법규정이 없는 경우에 왜 국회의 입법으로 불가능한 것인지 실질적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많은 나라에서 의회가 국민투표 없이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데, 이는 의회가 다름 아닌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주권의 대행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 법률은 투표의원 194인 중 찬성 167인(반대 13인, 기권 14인)으로 재적과반수와 출석 3분의 2 이상의 압도적 다수로 통과되었는데, 그러한 입법이 국민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는, 혹은 민의를 배신하였다는 정치적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별도로 하고, 적어도 헌법적 측면에서 그것이 “국회의원들의 권한이 아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결론은 관습헌법으로써 국회의 헌법상의 입법권한을 부인하는 것이고, 이는 헌법을 변경하는 것이 되므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관습에 의한 헌법적 규범의 생성은 국민주권이 행사되는 한 측면인 것이다.”라고 하나, 성문헌법 체제하에서 국민주권의 행사는 저항권의 행사와 같은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성문헌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국민의 의사인지를 확인하기 어렵고 국민들 간에도 특정 사안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 있으므로, 헌법이 객관적으로 규정한 제도화된 절차가 아닌 헌법 외적인 방식으로 “국민주권의 행사”를 인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헌법이 예정하지 않은 그러한 문제는, 그것이 국가의 위기상황에 관련된 것이 아닌 한,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6) 결론적으로 서울을 수도로 한 관습헌법의 변경이 반드시 헌법개정을 요하는 문제라고 할 수 없고, 헌법해석상 국회의 입법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이 헌법 제130조 제2항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나. 한편 나는 별개의견이 이 사건 법률은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였다고 한 논지도 받아들일 수 없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에게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인지 여부에 관하여 재량을 주고 있는데,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그 재량 여부가 달라진다고 해석할 수 없다. 헌법 제72조가 대통령에게 과도한 재량을 주고 있어 국민주권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효과적인 제도인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현행 헌법상 위와 달리 해석할만한 근거가 없다. 또한 그러한 재량은 헌법이 직접 부여한 것이므로, 행정법상의 재량권의 일탈·남용 법리는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행정수도의 이전 정책에 대하여 대통령이 국민투표 부의를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국민투표권이 행사되지 못했더라도, 이로 인하여 청구인들의 국민투표권이 침해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청구인들의 국민투표권 침해 주장은, 권리의 침해가능성 자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부적법하다. 청구인들이 주장한 다른 기본권 침해 주장 역시 기본권 침해의 자기관련성, 직접성 혹은 현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기본권 침해”를 구제하기 위한 헌법소원절차에서, 헌법재판소가 본안판단을 하기에 부적법한 것이다.

2004/10/22 16:49 2004/10/22 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