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라는 욕망의 대상 : 알튀세르에서 크리스테바까지 - 민승기


프로이트는 동일시가 소유 구조보다 우선적이며 더 근원적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대상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는 <어머니의 젖가슴은 내 거야>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어머니의 젖가슴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동일시가 대상 지향적 사랑보다 더욱 근원적이고 대상 지향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대상 지향적 사랑을 기초로 하는 오이디푸스 체계로 되돌아간다. 근본적으로 서로 구별될 수 없는 동일시와 대상 지향적 사랑을 구분하고, 대상 지향적 사랑을 최종적인 설명의 원칙으로 삼으려는 프로이트의 의도는 무엇인가? 프로이트가 동일시를 겉모습일 뿐이라고 도외시하고 그것을 오이디푸스 구조로 환원시키려는 이유는, 동일시 속에서 드러나는 나와 타자의 반전 가능성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서로 대체 가능한 동일시 속에서는 어느 것도 기원적이고 진정한 것이 될 수 없다. 오이디푸스 가설은 동일시 속에서 드러나는 반전 가능성들을 안정된 구조 속으로 편입시켜 기원적 주체가 탄생하도록 한다.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동일시 속에서 구별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했던 나와 타자는 이제 자기 동일적 주체와 자기 동일적 객체로 구분된다. 구별, 분리, 차이로서의 아버지가 개입하고 어머니는 성적 대상으로 환원된다. 구별될 수 없는 것들이 분리될 때 의미가 만들어지고 차이를 근간으로 하는 상징적 의미들이 문화를 구성한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이제 모든 문화의 보편적인 구조가 된다.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 이론들이 문제삼는 부분이 바로 이 오이디푸스 구조의 보편성이다. 그것은 차이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닫혀 있는 안정된 구조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무대에서 모든 것은 반복되고 대체 가능하며 내부적인 저항에 열려 있다. 오이디푸스 구조를 이데올로기나 억압된 제도로 보고 그 구조 자체를 열어제치려는 여러 움직임들이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 이론들을 특징짓게 된다.

알튀세르에게 오이디푸스 구조의 보편성은 무엇보다도 가족family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구현된다.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언어적 범주를 통해, 다시 말해 분리나 차이를 통해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족 속에서 -- 예를 들어 근친상간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아들간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이므로 금지되어야 한다 -- 이미 항상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으며 자신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아이는 이미 존재하는 구조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인social 정체성을 자신의 것인 양 믿게 된다. 사회적인 것을 자율적인 것으로 오인하여 스스로를 자율적인 주체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이다. 호명interpellation이란 개념이 보여 주듯이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집되고 변형된 개인이다. 주체는 지배한다기보다 이미 종속되어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는 의식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허위 의식이라기보다 오이디푸스 구조처럼 지극히 무의식적인 것이다. 라캉의 상상계가 오인(誤認)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 주체의 형성 과정에 꼭 필요한 경험인 것처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역시 허구이기는 하지만 주체를 주체로 만들어 주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알튀세르는 압축이나 전치와 같은 꿈의 기제들이 사회적 영역에서도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이미지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압축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시 말해 중층 결정되어overdetermined 있다. 그 요소들은 기계론적 인과론이나 총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미 서로 얽혀 있다. 더욱이 궁극적으로 생산 관계나 생산 양식에 의존하는 갈등들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속에서 위장되고 생략되고 변형되어 드러난다. 이것은 마치 꿈속에서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자리를 바꾸어displacement 나타나는 것과 같다. 텍스트 역시 꿈처럼 조직되어 있다. 그러므로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부분보다 말하고 있지 않은 부분이 더 중요하다. 텍스트가 억압하고 있는 부분, 의도적으로나 별다른 의도 없이 숨기고 있는 부분이나 단절, 틈새 등을 읽어 내는 것이 알튀세르의 징후 독법symptomatic reading이다.

블랑쇼의 말처럼 푸코는 정신분석학 자체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고고학>은 이제까지 잊혀져 왔던 성sexuality의 역사를 추적한다. 성이란 이미 주어져 있는 자연적이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개념처럼 역사의 산물이다. 19세기 이전에도 동성애는 여전히 비난받았지만 그것은 일탈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동성애는 더 이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종>이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바뀌었다. 이제 동성애 행위가 아니라 그가 동성애자인가가 문제된다. 성은 존재나 정체성을 규정하는 비밀이 되어 <동성애자들>이 탄생한다. 광기 역시 질병이 아니라 역사이다. 이성에 의해 배제된 것들은 정신병으로 취급되어 감금되고 통제된다. 심리 병리학은 수용소 안에 배치되었던 모든 구조들을 의사 쪽으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다. 심리학의 장치들은 비이성적인 것들을 은폐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수단일 뿐이다. 푸코는 정신의학이 숨기고 있는 지배 욕망을 읽어 낸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광기를 해방시킨다고 주장하는 학문 자체에 의해 광기가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푸코가 억압 가설repressive hypothesis을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억압 가설은 19세기에는 억압되었던 성이 현대에 와서 점차로 해방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19세기에 성은 억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종류의 담화(의사, 목사, 소설가, 심리학자) 속에서 만들어졌다. 성은 이질적인 현상들을 통합하는 개념으로 고정되고 개인의 비밀이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성을 단순히 권력과 대립 관계에 두는 것은 오히려 권력의 편재성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은 권력에 의해 억압된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산된다. 우리는 성을 옹호함으로써 권력에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권력은 자신과 반대되는 것까지도 지식의 형태로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푸코는 광기의 역사는 광기에 대한 정신분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학문적 인식이나 철학적 이성에 포착되기 이전의 언어로 광기가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두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광기가 주제인 동시에 주체인 역사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것이 푸코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인 동시에 그의 가장 광적인 부분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분석 상황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분석가가 불가능하듯이, 이성의 언어를 완전히 벗어난 광기의 언어 역시 불가능하다. 광기의 중얼거림 역시 이미 이성적 언어에 의해 침윤되어 있다. 문제는 정신분석학이나 광기, 성 같은 것들을 대상으로 고정시켜 분석하지 않고 그것들의 역사를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광기 역시 이성적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나타날 수 없다는 점에서 광기와 이성적 언어는 이미 서로 중첩되어 있다. 문제는 단지 어느 한 쪽을 배제하거나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요소들이 이미 서로에게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것을 유령 출몰haunting이라 부른다. 대립적인 요소들은 비가시적인 형태로 이미 서로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체계를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 속에서 체계를 능가하는 지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누구도 이 오염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체계 속에서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잉여물들을 구한다. 그것은 주로 주석, 서문, 후기들과 같은 주변적 요소margin들로서 단순히 본문을 보충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복시키거나 환치시킬 수 있는 보환supplement으로 작용한다. 데리다에게 텍스트의 무의식은 텍스트가 주장하는 것과 묘사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 속에서 드러난다. 루소의 글쓰기를 다루는 방식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루소는 글쓰기를 배제한다고 공언해 놓고 실제로는 글쓰기가 이미 언어 속에 들어와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모델인 요술 책받침은 데리다에게 글쓰기의 모델이 된다. 무의식은 숨겨져 있는 진리,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의미가 아니라 차이 또는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요술 책받침은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짐으로써 계속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동시에 이전의 것들은 왁스판 아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의미는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이전 것들과 새로운 감각들간의 차이에서 생긴다. 프로이트도 처음에는 글쓰기를 단지 기억을 돕는 도구로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그는 글쓰기가 기억 자체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요술 책받침이 양손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글쓰기의 도움 없이 기억은 불가능하다. 글쓰기는 기억을 단순히 보충해 주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기억의 한가운데서 기억 자체를 가능하게 한다. 데리다는 이렇듯 개념 체계 속에서 그것을 능가하는, 다시 말해 그 개념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을 무의식과 연결시키려 한다.

알튀세르에게 오이디푸스 구조는 <이데올로기>였고 푸코에게는 <역사를 가진 것>이었으며 데리다에게는 <구조 속에서 구조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3각형 구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은 지라르에게서 온다. 지라르는 동일시가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보다 우선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충실히 따라간다. 우리는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모방한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 무대에서 나와 타자가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나의 욕망이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라이벌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욕망한다. 욕망은 일차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다. 지라르는 대상 선택을 기반으로 하는 오이디푸스 구조 속에 억압되어 있는 모방 욕망을 드러낸다. 욕망은 대상의 자질이나 주체의 기질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욕망은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의 무대에서는 욕망의 주체나 욕망의 대상이 서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늘 타자가 되려는 욕망이다. 타자가 가진 것을 원한다 해도 그것은 그 대상이 타자를 타자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이렇듯 대상과는 관계없는 <타자가 되려는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metaphysical desire>이라 부른다. 문화적이고 해석학적인 문맥을 생략한 채 억압된 것을 드러내어 더욱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미국의 프로이트 수용과는 달리 프랑스에서의 프로이트 수용은 실존주의나 데카르트가 해결하여 주지 못했던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문제>, 다시 말해 사회성sociality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다.1)

지라르는 욕망이란 타자에 의해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헤겔의 공식을 더 밀고 나가 모방 욕망을 논한다. 반면 루스탕Franis Roustang은 타자와의 관계, 특히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전이>의 문제를 다룬다. 분석의 목적은 전이를 없애고 피분석자를 분석가로부터 독립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전이를 통해 분석가들은 피분석자를 종속시키고 그들을 제자로 만들려 한다. 전이가 만들어 내는 이런 종속 관계는 프로이트나 라캉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던 욕망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제도>나 <협회>를 통해 권위를 행사하려 했던 반면 라캉은 순전히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의존했다. 그는 자신을 초현실주의적 대상으로 만들고자 했다. 전이가 갖는 이런 권위적 측면은 그것이 최면과 연결될 때 더욱 심화된다. 최면은 피분석자를 더욱 분석가에게 종속시키는 마법적 힘이다. 정신분석학은 최면이나 전이의 문제와 결별해야 한다. 루스탕이 전이가 갖는 권위나 지배욕에 천착했던 반면 야콥센Mikkel Borsch Jacobsen은 전혀 다른 이유로 최면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부각시킨다. 최면은 권위를 통한 종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심리에 근원을 둔 것이다. 왜냐하면 최면 속에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무대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객체의 구별이 사라지고 동일시가 지배적인 최면 속에서 <나는 타자이다>, <나는 타자의 장소에서 말한다>. 바로 여기서 야콥센은 지라르와 만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정신 분열증적 욕망을 이야기한다. 오이디푸스 구조는 그들에게 자본주의 담론의 상품성을 보장해 주는 구조일 뿐이다. 그들은 욕망이 규정된 길로 통하게 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오이디푸스 구조에 반대하여 자본주의 생산의 상징 질서를 잠재적으로 작동 불가능하게 하는 욕망의 정신 분열증적 유출을 지지한다. 그들은 정신 분열증적 욕망의 유동적이고 다양하게 분출하는 강렬함, 사회 제도나 법의 억압적 기능에 저항하는 강렬함에 찬사를 보낸다.

오이디푸스 구조 중 가족 구조는 리비도적 욕망을 억압하는 주된 제도적 양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pre-Oedipal로 되돌아가 (오이디푸스적) <주체 없는 기계>를 말한다. 다차원적이고 비연속적이며 가변적인 오이디푸스 전단계의 욕망들은 오이디푸스를 통해 억압 구조 속으로 약호화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무의식적 생산을 가족의 근친 상간적 영역으로 일임하면서 욕망을 <개인화>한다. 정신 분열증은 동일시, 범주화, 차별화를 거부한다. 무의식적 욕망은 단순히 불확정적, 비개인적이며 재현될 수 없다. 무의식적 욕망은 욕망하는 기계이다.

크리스테바 역시 전제적인 상징계에 대항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로 향한다. 거기서 그녀가 마주치는 것은 비천한 어머니abject mother와 상상적인 아버지imaginary father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를 지칭하는 그녀의 모든 개념들은 이미 상징 질서에 침윤되어 있다. 그녀는 정신분석의 무대에서 대상보다는 동일시가 우선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어떤 것도 순수한 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기호계the semiotic는 상상계 이전의 단계이지만 이미 상징적 의미에 침윤되어 있다. 말word과 육체flesh는 같이 있다WORD FLESH. 오이디푸스 구조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은 모성적인 기호계와의 만남, 즉 어머니와의 동일시이다. 비천한 어머니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단계에서 어머니는 아직 대상이 아니고 아이 역시 아직 주체가 아니다. 비천한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갖기 전, 주체나 객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비천한 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 비천한 것들과 분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천한 것은 원초적 어머니와 연관된다. 아이는 상징적 질서로 진입하기 위해 원초적 어머니와 분리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아이는 어머니를 증오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어머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체라고도 객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비천한 육체가, 이 비천한 육체와의 동일시가 상징 질서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안/밖의 구분, 주체/객체의 구분을 와해시킨다) 가능하게 한다(비천한 육체와의 분리를 통해).

크리스테바는 비천한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상상적인 아버지를 말한다. 상상적인 아버지는 권위나 법으로 나타나는 라캉의 엄숙한 아버지와는 달리 사랑의 아버지이다. 사랑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혼합물이다. 그것은 성차를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라는 점에서 이미 이 단계에도 어머니의 육체 속에 상징계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상상적인 아버지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환유적 아버지 이전에 존재하는 은유적 아버지이다. 아이는 은유적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비천한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상상적 아버지는 아이로 하여금 비천한 어머니와의 동일시 속에서 잡혀 먹지 않고 분리될 수 있도록 해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혼합물인 상상적 아버지는 어머니와 그녀의 욕망이 결합된 것이고 어머니 속의 아버지이며 모성적인 아버지이다. 크리스테바에게 오이디푸스 구조를 넘어서는 두 가지 방식은 비천한 어머니와 상상적인 아버지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것은 주체와 객체의 분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일시이다. 크리스테바가 비천한 어머니뿐만 아니라 상상적인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것도, 또 상상적인 아버지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혼합물인 이유도 주체/대상, 남성/여성의 대립 구조가 불가능해 지는 동일시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그녀는 모든 것은 오염되어 있다는 정신분석학 무대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구조주의 이후 프랑스 이론가들이 프로이트에게 배운 것은 정신분석학이 관객의 위치를 허용하지 않는 무대라는 사실이다. 정신분석의 무대 속에서 행해지는 것은 우선적으로 동일시이다. 이 단계에서 주체와 대상은 구별되지 않으며 나는 타자이다. 구분되지 않는 혼합물들을 주체와 대상으로 분리하는 차이 또는 법으로서의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오이디푸스 구조가 시작된다. 오이디푸스 구조는 이미 그 속에 자신을 전복시킬 수 있는 동일시의 구조를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 이론가들이 개입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은 오이디푸스 구조의 폭력성을 때로는 억압적 태도로, 때로는 이데올로기로, 때로는 전이라는 마법적 권위 등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이디푸스 구조 속에서 그 구조를 능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들의 논의 속에서 오이디푸스 구조는 역사적인 구성물로, 폭력적인 억압 구조로,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의 폐쇄 회로로 드러나며 모든 것이 혼합물로 존재하는 오이디푸스 전단계를 통해 초월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프로이트라는 좌절/매혹의 기표이다. 욕망의 대상, 대상이라고 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 프로이트는 이론의 욕망을 촉발시키는 동인으로 남아 있다. 데리다의 말대로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신분석이다>.

1) 프랑스에서의 프로이트 수용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Eugene Webb, The Self Between : From Freud to the New Social Psychology of France (Seattle : Univ. of Washington Press, 1993) 참조.

글쓴이 민승기는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 강사, 인문학 연구소 연구 위원이다. 주요 논문으로 좥폴 드만, 이론에의 저항좦, 좥라캉이라는 이름의 기표를 애도하기좦, 좥라캉의 타자좦, 좥바바의 모호성좦, 좥해체론과 문학좦 등이 있고 역서로 『욕망 이론』(공역), 『포스트모던의 조건』(공역),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공역) 등이 있다.

미메시스(http://openbooks.co.kr/mimesis/), 1999

2007/06/14 01:58 2007/06/14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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