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5

2009/02/25 02:39 / My Life/Diary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ㅡ「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

값싸고 양 많은 공동번역 성서를 꺼내들자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몇몇 신도들과 김 스테파노 추기경이 놀이터 앞에서 꽃을 들고 있다. 20년이 훌쩍 넘어버린 성경과 사진이다.

아! 네가 비참하게 되리라.
자기를 빚어 낸 이와 다투는 자여.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와 어찌 말다툼하겠느냐?
ㅡ「이사야」45:9-11

아마도 나는 사진 바깥 어디선가 그네를 타고 있을 것이다. 아무 기억도 없지만, 나를 처음 가르친 곳은 천주교 유아원이다. 내 한계선은 거기서 그어졌다. 이 마르꼬 소년.

나는 복음서 아무 데를 찾아보아도
계명이나 위협이나 금지를 찾아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아버지, 저도 역시 영혼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어요.” 그는 말했다.
“아니다, 너는 영혼들의 복종을 바라고 있지.”
“복종 속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ㅡ『전원교향악』, 앙드레 지드

한 달 쯤 전부터 윗어금니 잇몸에 염증이 생겨서 시큼거리고 피가 흐른다. 입 속을 흐르는 피 때문에 구취가 생길 무렵, 김 스테파노 추기경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은 이미 그때 몇 가지 쓸거리를 구상했다. 그리고 내심 이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그렇지만 하느님 없이 인간이 과연 선한 일을 행할 수 있을까?
문제는 바로 이거야. 나는 언제나 그 문제를 갖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인간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ㅡ『까라마조프가 형제』, 도스토옙스키

마지막 고해성사는 고역이었다. 고할 죄를 만드는 일에 지쳐버렸다. 벽 뒤에 누가 있던지 간에, 인간의 죄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김 스테파노 추기경 옆에서 꽃을 들고 있던 이 데레사 여사는 요즘 미신에 빠져 있다. 몇 년 전에는 부적을 쓰는데 돈을 대더니, 급기야 좋은 이름을 반복해서 들으면 운명이 바뀐다는 아주 <과학적인> 미신에 혹해 두 번째 이름을 만들어 왔다. ㅡ 아, 그 돈은 다만 얼마간의 헌금입니다. 어디에 쓰이던 천국의 천칭에선 같은 질량을 갖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말이죠?) 상황이 종교를 만듭니다. 꽃도 신앙도 인간도, 철이 바뀌면 시들지요.

피는 계속 흐르고 염증은 낫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쑤실 것만 같다.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나니.
아멘.

2009/02/25 02:39 2009/02/25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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