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도쿄돔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의 WBC 예선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10년쯤 전이었다면 오늘처럼 일본에 콜드 게임으로 지는 것도 그리 충격적인 사건은 아니다. 그만큼 한국 야구가 성장했다고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특히 오늘 흥미로운 것은 스무 살의 김광현을 흔드려고 서른 다섯의 이치로가 기습 번트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오래 전에 친선 경기인지 슈퍼 게임인지 당시 일본 오릭스 소속이던 이치로가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에도 슈퍼스타이던 이치로는 경기에 출전하기는 커녕 파울 라인 옆에서 캐치볼만 하고 들어갔다. 그 모습이라도 보겠다고 중계 카메라며 관중들이 그리로 몰렸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이겨보겠다는 일념으로 기습 번트며 6점 차에 도루까지 (확신하건데 모두 이치로 스스로의 선택이다.) 감행하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한국 대표팀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김광현은 오늘 분명 컨디션이 안 좋았다. 그것이 치통, 진통제, 공인구 적응, 스트라익 존, 압도적 분위기 등등 어느 것이 되었건 간에 킬러로서의 구위는 아니었다. 단조로운 구종의 그가 구위를 잃은데다 커맨드 마저 찾지 못하니 박경완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고... 결국 애매한 변화구 하나를 통타 당해 자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광현은 아직 스무 살. 평생의 자산이 될 쓰디쓴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면 한국 야구의 앞날은 더욱 밝다.

어찌 보면 오늘 콜드 게임은 차라리 좋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직 감을 찾지 못한 추신수나 이대호 같은 중심 타자들이 더 많은 경기를 뛰며 감을 끌어올릴 수 있고, 흐릿한 목표 의식의 선수들 스스로가 다시 각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중국에 진다면... 야구는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경기에서 다소 의아했던 점은 박경완을 일찍 내린 것이다. 김광현 리드의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말했듯 박경완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았고, 김인식 감독도 이를 충분히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광현이 무너진 후 김인식 감독은 경기를 포기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후 구원 나온 정현욱을 빨리 내리고 장원삼을 길게 가져간 것을 봐도 그런 마음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더불어 어제 대승을 거둔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라도 콜드 게임을 내주고 팀을 재정비해 본선에서 겨뤄보자는 심산이 아니었을까? 살을 주고 뼈를 친다.

예선전 최선의 목표는 본선 진출이고, 대만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 목표는 거의 달성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콜드 게임이 치욕스럽기는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잊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대표팀은 일본 아마추어 팀에게도 패했던 전력이 있다. 나는 끝까지 긍정적인 시각으로 대표팀을 바라보고 싶다. 시합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2009/03/07 22:32 2009/03/07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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