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별세

2009/05/10 10:57 / My Life/Diary
암투병 소아마비 수필가 장영희 교수 별세 (중앙일보, 2009.05.09)
癌 투병 장영희 교수 “내 계획에 죽음은 없다” (동아일보, 2005.08.24)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유명인들의 유언 모음집>이라는 책을 갖고 있다. 유학할 때 어렵게 발견해서 일부러 주문한 책이다. 가끔 심심하면 들여다보는 책인데, 기라성 같은 사람들의 삶을 마치는 마지막 말답게 기막힌 아이로니와 재치, 철학적 메시지들이 담겨 있는 유언들이 많아서, 내가 읽은 그 어느 위대한 작품 못지않은 여운과 메시지를 준다.

나는 본격적으로 유언집을 꺼내 들었다. 책에 코를 파묻은 채 유명한 사람들의 유언을 열심히 보며 어떤 말을 조금 바꿔서 내 유언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 연구해 보았다.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이 “잘 있거라, 모든 사람들아(Bye, everyone)” 라고 한 것을 “잘 있거라, 한국 사람들아” 로 바꿔 볼까, 아니면 콘래드의 작품 <암흑의 오지(Heart of Darkness)>에 나오는 주인공 크루츠가 말한 “끔찍하다, 끔찍해(Horror, horror)” 를 거꾸로 “멋지다, 멋져” 라고 할까.

콘래드 자신의 마지막 말은, “여기......” 였다고 하는데 그럼 나는 “거기” 라고 할까. 아니면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을 변용해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돌아가노라” 라고 할거나? 또 아니면 지난번 돌아가신 마더 데레사처럼 “이제 더 이상 숨쉴 수가 없구나(I can't breathe anymore)” 를 바꿔서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구나” 로 할거나.

한참 동안 들여다봐도 신통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꾸 책상 위에 높이 쌓여 있는 시험지로 눈이 가고 내일은 학생들에게 꼭 돌려줘야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유언집을 침대에 내려놓고 다시 채점을 계속했다.

이번 시험은 문제가 어려웠는지, 60점 이하의 학생들이 꽤 많았다. 점수가 나쁜 학생들의 시험지에다가 “꼭 내게 와 면담할 것! (You've got to come and see me!)” 이라고 쓰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아, 내 유언은 바로 이 말, ‘You've got to come and see me!’ 가 어떨까.” 아니면 퇴근할 때 과 사무실의 조교들에게 하는 말, “수고해라, 나 간다” 는 어떨는지? 또는 학생들 시험 감독하다가 화장실 다녀올 때 하는 말, “커닝하지 말아요, 나 금방 돌아올테니” 는?

그때 갑자기 밖에서 길고 날카로운 경고 사이렌이 들려왔다. “어, 무슨 사이렌이지?” 달력을 보았다. 10월 28일. 민방위날도 아닌데. “그럼 진짜잖아!”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다시 한 번 사이렌이 울렸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나 보다. 북한에서 쳐들어온 것 아닌가?”

외삼촌 댁에 가신 어머니에게 전화하기 위해 급히 안방으로 갔다. 아무리 서랍을 뒤져도 전화번호책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동생집에 전화해야지. 그런데 번호가 어떻게 되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제 차에 휘발유가 떨어져 연료 탱크가 비었다는 사인이 계속 켜졌는데 귀찮아서 주유소에 들르지 않은 것도 후회가 되었다. 마음은 더 급해 왔다.

그때 현관 문이 스르르 열리며 여섯 살짜리 조카 건우가 이상하게 생긴 나팔을 불며 들어왔다. 소리가 민방위 경보와 아주 흡사했다. “건우야, 너 아까부터 이것 불고 있었니?” 건우는 계속 나팔을 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진짜 비상 경보가 아니라 건우 나팔 소리였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황급하게 뛰쳐나가는 바람에 유언집은 침대 발치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죽기 싫은데 유언은 무슨 유언.’

다시 책상 앞에 앉으며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고 뭐고 평상시에 하는 말이나 잘하고 살아야지, 생각하며 다시 채점을 하기 위해 빨간 펜을 들었다.

그런데 가만있자, “이 세상에 남기는 말 한마디보다 평상시에 말을 잘하고 살자” 는 유언으로 어떨까?

ㅡ 장영희,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내 생에 단 한 번』(2000), pp.177-182 부분
2009/05/10 10:57 2009/05/1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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